독도는 울릉도 동남쪽 87.4km에 위치하고 있고, 과거에는 사람이 거주할 수도 없었고 일부러 거주할 이유도 없는 2개의 암초로 된 무인도였다.
독도와 울릉도는 날씨가 맑고 바람이 부는 날에 서로 바라볼 수 있는 섬이다.
신라시대 울릉도에는 우산국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울릉도 거주민들은 독도를 바라볼 수 있어 그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독도는 자연 지리적으로 울릉도 거주민들의 삶의 터전으로써 한국의 고유영토이다. 반면 일본 열도에서 독도에 가장 가까운 섬은 오키섬이다.
일반적으로 최대 가시거리가 100
km이기 때문에 오키 섬에서 독도까지 157km로서 두 섬은 서로 바라볼 수 없다. 따라서 일본의 오키섬은 자연 지리적으로 독도와 아무런 연고가 없다.
조선정부의 고문헌 기록으로 볼 때도 1454년의 세종실록 지리지에 “우산도와 울릉도 두 섬은 날씨가 맑고 바람이 불고 청명한 날 서로 바라볼 수 있다”라고 두 섬의 지리적 위치를 정확하게 표기했다.
오늘날 울릉도에서 날씨가 맑은 날에 서로 바라볼 수 있는 섬은 독도뿐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독도를 우산도라고 호칭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독도는 일본열도에서 가시거리 밖에 위치하기 때문에 자연 지리적으로 일본영토가 될 수 없고, 일본의 고문헌에도 일본영토라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1667년의 <<은주시청합기>>에는 “일본의 서북경계는 오키섬으로 한다.”라고 하여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기록했다.
실제로 “보인다” “안 보인다”에 대한 고증은 고지도 고문헌의 증거자료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보인다”고 하는 자연 지리적 조건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지리적으로 독도가 보이지 않는 일본열도의 일본 정부가 독도가 보이는 한국(울릉도)보다 더 먼저 독도를 발견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도 영유권을 날조하는 행위이다.
첫째, 일본정부는 “현재의 다케시마는 일본에서 일찍이 ‘마쓰시마(松島)’로 불렸으며, 반대로 울릉도가 ‘다케시마’ 또는 ‘이소 다케시마’로 불렸다. 다케시마 또는 울릉도의 명칭에 대해서는 유럽의 탐험가 등에 의한 울릉도 측위(測位)의 잘못에 따라 일시적인 혼란이 있었지만, 일본국이 ‘다케시마’와 ‘마쓰시마’의 존재를 옛날부터 인지하고 있었던 것은 각종 지도나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경위선을 투영한 간행 일본지도로서 가장 대표적인 ‘나가쿠보 세키스이(長久保赤水)’의 <개정일본여지로정전도(改正日本輿地路程全図)>(1779년 초판) 외에도 울릉도와 다케시마를 한반도와 오키 제도 사이에 정확하게 기재하고 있는 지도가 다수 존재한다.”라고 주장한다.
일본의 오야씨, 무라카와씨 두 가문의 어부들이 1620년대부터 1693년까지 쇄환정책으로 섬을 비워서 관리하던 조선(한국)영토인 울릉도에 불법적으로 도해했을 때 그 경유지에 위치한 독도를 이정표로 삼았다.
이때부터 일본은 두 섬의 존재를 알게 되고 울릉도를 “다케시마(竹島)”, 독도를 “마쓰시마(松島)”라고 불렀다.
1693년 한일 양국 어민들 사이에 울릉도 독도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인 안용복사건을 계기로 일본 막부는 1695년 돗토리번에서 올린 답변서를 토대로 1696년 울릉도와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정하고 일본어부들의 울릉도(독도 포함) 도해를 금지하였다.
이미 안용복사건 이전에도 돗토리번에서는 번관리가 편찬한 <은주시청합기>에 “일본의 서북쪽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위치하고, 일본의 서북경계는 오키섬이다.”라고 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정했다.
안용복 사건이후에도 1836년 울릉도 밀무역사건인 하치에몽 사건으로 울릉도 독도 도해를 2차적으로 금지했다.
일본은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가장 유력한 증거자료로서 <개정일본여지로정전도>(1779년 초판)를 제시했지만, 이 지도는 잘못된 지도이거나 영유권 지도가 아니다.
1696년 이미 막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도에는 일본영토처럼 그렸기 때문이다.
만일 일본정부가 제시한 것처럼 독도가 일본영토이라는 유력한 증거자료라면 울릉도도 일본영토가 된다. 바로 이런 것들이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날조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실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는 1779년 초판, 1791년 재판, 1811년 3판, 1833년 4판, 1840년 5판, 그 이후 1844년, 1846년, 1862년, 1871년까지 9판이 간행되었다. 이 가운데 5판까지는 초판과 동일하게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영토로 그렸으나, 1844년 판부터는 민간에서 발행된 해적판으로 울릉도·독도에 일본 본토와 같은 색을 칠하고, 경위선까지 연장해 일본의 영토처럼 그렸던 것이다(최선웅연구).”
둘째, 일본정부는 “1787년 프랑스의 항해가 라 페루즈가 울릉도에 도착하여 ‘다줄레(Dagelet) 섬’으로 명명하였다. 그 후 1789년에는 영국의 탐험가 컬넷도 울릉도를 ‘발견’했으나 그는 이 섬을 ‘아르고노트(Argonaut) 섬’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라 페루즈와 컬넷이 측정한 울릉도의 경도와 위도에는 차이가 있으며 그로 인해 후에 유럽에서 작성된 지도에는 울릉도가 마치 2개의 다른 섬인 것처럼 기재되었다.” “나가사키 데지마의 의사 시볼트는 유럽에서 “일본지도”(1840년)를 간행했다.
시볼트는 오키 섬과 한반도 사이에는 서쪽에서부터 ‘다케시마’(울릉도의 에도시대 호칭)와 ‘마쓰시마’(현재 다케시마의 에도시대 호칭)라는 2개의 섬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본의 여러 문헌이나 지도를 통해 알고 있었다. 한편, 유럽의 지도에는 서쪽에서부터 ‘아르고노트 섬’과 ‘다줄레 섬’이라는 2개의 명칭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를 근거로 시볼트는 자신이 작성한 지도에 ‘아르고노트 섬’을 ‘다카시마’로, ‘다줄레 섬’을 ‘마쓰시마’로 기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당시까지 일관되게 ‘다케시마’ 또는 ‘이소 다케시마’로 불려 오던 울릉도가 ‘마쓰시마’로도 불리게 되는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다.“라고 주장한다.
프랑스 항해가는 울릉도의 경위도를 올바르게 표기했지만, 영국탐험가가 울릉도의 경위도를 잘못 표기하여 유럽지도에 울릉도가 2개의 섬으로 표기되었다.
네덜란드인 의사 시볼트가 이들 두 섬에 일본의 지도를 모방하여 “다케시마”(울릉도)와 “마쓰시마”(독도)라고 이름으로 잘못 표기하여 섬 명칭의 혼란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자국의 영토라면 고유의 명칭을 갖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유럽지도의 영향으로 섬 명칭의 혼란을 초래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실효적으로 영토를 관리했음을 인정받는 영유권 주장을 할 자격이 없다.
셋째, 일본정부는 “일본 국내에서는 예로부터 내려온 ‘다케시마’와 ‘마쓰시마’에 관한 지식과 그 후 구미에서 지어진 섬의 이름이 혼재하고 있었는데, 그러는 중에 ‘마쓰시마’를 멀리서 보았다는 일본인이 마쓰시마를 개척할 수 있도록 정부에 청원하였다. 정부는 그 섬의 명칭을 명확히 하기 위해 1880년 현지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이 청원 과정에서 ‘마쓰시마’라 불리던 섬이 울릉도임을 확인하였다.”
일본정부는 “이상의 경위를 토대로 울릉도는 ‘마쓰시마’로 불리게 되었으며 따라서 현재의 다케시마의 명칭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정부는 시마네현의 의견을 청취한 후, 1905년 그때까지의 명칭을 모두 대체하는 형태로 현재의 다케시마를 정식으로 ‘다케시마’라고 명명하였다.”라고 주장한다.
울릉도와 독도는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한일 양국의 고지도와 고문헌에 기록된 한국의 고유영토이다.
17세기 일본 막부는 울릉도와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정하고 일본어민들에게 도해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에 울릉도와 독도의 지리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섬 명칭의 혼란을 겪은 것이다.
울릉도 독도 도해금지 이후 200년이 지난 메이지정부도 1877년 막부의 도해금지령 서류를 검토하여 태정관지령으로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인정했고, 1880년 실지를 조사하여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재확인했다.
그런데 일본이 한국보다 먼저 독도를 인지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도의 영유권을 날조하는 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