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여기서 우리끼리 서로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모른다고 했다.
“바나나요.”
껍질은 노랗고 속은 희다는 뜻이라고 했다. 얼굴은 한국인, 머릿속은 미국인. 청년은 웃으며 말했다. 객석도 웃었다. 저희들끼리 오래 쓴 말이어서 농담이 되어 있었다. 나는 웃지 못했다.
바나나는 자조였다. 스스로를 깎는 말에는 상처가 들어 있다.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자리에서 나온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의 안쪽을 그날 보지 못했다. 다음 질문만 생각하고 있었다.
곧바로 내가 물었다.
"독도를 압니까."
강당이 조용해졌다. 아는 학생도 있었다. 뒤쪽에서 반문이 돌아왔다.
"그게 뭔데요?"
옆자리 청년이 거들었다. "한국하고 일본하고 싸우는 거요."
나는 그 침묵을 저들의 결핍으로 읽었다. 그것이 내 잘못이었다.
그들은 미국에서 나고 자랐다.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다른 대륙의 역사다. 부모는 가방 하나로 태평양을 건너와 영어를 먼저 가르쳤다. 그것이 생존이었다. 동해에 풍랑이 일어도 그들의 식탁은 흔들리지 않는다. 핏줄이 있으니 알아야 한다는 말은 껍질에 닿을 뿐이다. 피는 부를 수 있지만, 앎은 강요할 수 없다.
돌아보면 그날의 질문은 내 것이었다. 나는 국제법을 가르쳤고, 독도는 내 평생의 주제였다. 준비해 간 슬라이드에는 내가 아는 것만 들어 있었다. 그날 나는 자료를 더 보내 주겠다고 했다. 보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저 아이들이 무엇을 묻고 싶어 하는지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들의 질문은 다른 데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왜 밤 열두 시에 가게 문을 닫았는가. 어머니는 왜 학부모 모임에서 말수가 적었는가. 집에서 쓰는 말과 학교에서 쓰는 말은 왜 다른가. 나는 누구인가. 껍질과 속이 다르다는 농담을 왜 스스로 만들어 쓰는가.
그 물음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야 한국이 나온다. 한국을 지나야 한일 백 년이 나온다. 그 백 년을 지나야 비로소 섬이 나온다. 나는 그 순서를 건너뛰고 섬부터 들이밀었다. 답을 손에 쥔 채 길을 물은 셈이다.
약 20년이 지났다. 요즈음 세상이 바뀌었다. 세계의 젊은이들이 서울 골목을 걷고 한국어 가사를 따라 부른다. 예전에는 우리가 문을 두드렸다. 지금은 바깥의 눈이 먼저 이쪽을 본다. 문이 열린 쪽이 바뀌었다면, 들어가는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노래를 좋아하는 이에게는 가사에 실린 말의 결을 건네면 된다. 국물 한 그릇을 찾는 이에게는 그 상을 함께 받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건네면 된다.
이제 나는 늦은 답장을 쓴다. 이름도 얼굴도 흐려진 그 청년에게 쓴다.
그대에게 독도를 외우라고 하지 않겠다. 척후병이 되어 달라고도 하지 않겠다. 대신 묻겠다. 그대에게 한국은 무엇인가. 그대의 조부모가 건너온 바다는 어떤 바다였는가. 이웃한 두 나라는 왜 아직 매듭을 풀지 못하는가.
이 물음에는 시험지가 없다. 답을 찾는 데 몇 해가 걸려도 좋다. 스스로 찾은 답은 남이 쥐여 준 답보다 오래간다. 그 길 끝에서 동해의 바위섬 하나를 만난다면, 그때 독도는 외울 조문이 아니라 제 내력을 비추는 창이 될 것이다. 창은 억지로 열리지 않는다. 안이 궁금한 사람이 연다.
영토는 구호의 크기로 지켜지지 않는다. 사료와 지도, 그리고 그것을 제 말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 지킨다. 그런 사람은 강요로 자라지 않는다. 물음표 하나에서 자란다.
타코마의 비는 그날 저녁 내내 그치지 않았다. 나는 슬라이드를 닫고 강당을 나왔다. 독도를 묻지 말았어야 했다. 그날 내가 했어야 할 질문을 19년이 지나 적는다.
"여러분에게 한국은 무엇입니까.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