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람, 이런 봉사
▲ © 배동현 언론인 봉사를 하지 않고는 현대인의 축에 끼지 못하는 시대다. 서울 동자동에 김장권(62) 란 사람이 있다. 동자동모여인숙 4층 복도 끝에 김씨가 혼자 사는 한평 반짜리 방이 있다. 김씨는 “주인이 특별히 내준 넓은 방”이라고 했다. 방에는 알록달록한 조화(造花)가 가득했다. 김씨는 “방에 들어섰을 때 반겨주는 사람이 없어 꽃으로 장식했다. 길 건너 서울역 대형마트에서 3000~4000원 어치씩 샀다”고 했다.
김씨는 직업이 여럿이다. 오전 8시부터 네 시간 동안 남산야외식물원에서 청소(60만원)하고 점심. 저녁엔 복지관에서 노숙인 배식일(39만1000원)를 한다. 오후에는 폐지를 줍고 (6만원) 야간 사무실 청소(건당2만원~3만원)를 나간다. 이렇게 한 달 동안 버는 돈이 120만원 정도다. 거기서 매달 3만원은 제3세계 빈곤 아동을 돕는 NGO ‘월드셰어’에 기부하고 5000~3만원은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 회비로 낸다.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은 7개월 전 동자동 여인숙. 쪽방촌 거주자, 복지관 생활 노숙인 15명이 만든 봉사 모임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세상 탓하기보다는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걸 보여주자’는 취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참가자들은 모두 5000원의 거금을 내야한다. 김씨는 특별회비로 3만원을 낸 적도 있다. 김씨는 한 달에 한 번씩 이 모임에서 찐빵을 만들어 탑골공원에 모인 노인들에게 공짜로 나눠준다. 그가 말했다. “외로울 틈이 없다. 부지런히 일하고 남는 시간에 봉사 모임에서 회의하다 보면 하루가 빠르게 지나간다.”는 김씨는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서울 영등포로 이사 왔다. 여의도 비행장에서 일했던 아버지 덕에 2층 벽돌집에서 부유하게 자랐다. 김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간질을 앓았고 중3 때 죽을 고비를 넘겼다. 몸이 피곤하거나 신경이 예민해지면 발작이 찾아왔다. 소년에게는 중학시절 내내 “왜?”라는 의문이 따라다녔다. ‘왜 하필이면 나일까?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고통이 찾아오는 걸까?’ 아버지 근무처 때문에 인천 선인상고에 진학한 김씨는 학교 근처 천막교회를 지나다 봉사를 시작했다. 김씨는 “‘내가 살기 위해’ 봉사했다. 지금도 그렇다”고 했다. 김씨는 명지대를 2학년 때 중퇴하고 사우디 공사현장, 일본 친척집을 거쳐 1983년 펜팔로 알게 된 필리핀 여성과 결혼했다. 이후 필리핀에서 봉제공장하며 살던 김씨는 2006년 1월 어머니와 연락이 닿지 않자 혼자 한국에 들어왔다.
이미 어머니는 세상을 떠난 뒤였고 남은 형제들이 유산문제로 다투고 있었다. 그는 가족들과 크게 다투고 외톨이가 됐다. 이왕 한국에 나온 김에 돈이라도 벌어가려고 남대문 근처에 방을 얻고 인력시장에 다녔다. 첫해 집주인에게 가진 돈 전부를 빌려줬다가 돌려받지 못했다. 급기야 작년 3월 거리로 내몰렸다. “구멍 난 바지 입고 밥 얻어먹으러 다닐 수밖에 없었다.
새벽기도를 하러 가니 교인(敎人)들도 세 명 빼고 모두 모른 체했다. 필리핀에 있는 부인이 변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건가’ 원망했다.” 김씨는 복지관. 쉼터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경희대에서 열리는 ‘서울시 희망의 인문학’ 강좌를 들으며 마음을 잡았다. ‘난 키 쪼끄매도 지독한 사람이야. 돈 없다고 죽을 사람 아니야. 사람들이 거지라고 조롱해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다.’는 김씨는 작년 7월 희망근로로 번 돈으로 24만원짜리 여인숙 방을 얻었다. 곧바로 NGO 후원 신청을 받는 가판대에 신청서를 내밀었다. 신청서 받는 사람들도 그를 아래위로 흝어보아도 아무래도 좋았다는 이 사람은 “나도 남을 도울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란다.” 김씨는 지난달 말 모대학 축제에서 봉사 모임 사람들과 함께 떡볶이와 과일주스를 팔았다.
“이제 폐지 주으러 간다.”며 손수례를 끌며 길을 나서는 사람. 같은 처지의 노인들도 돕고 제3세게 빈곤아동도 돕는 이 사람 “난 쪽방 살아도, 돈 없어도 이웃도우며 산다는 이런 사람! 이런 봉사! 나 보다 여유 있는 당당한 이 사람의 선행을 듣고, 절로 고개 숙여 지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