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완종 사건, 경찰의 유감스러운 처신
"어떻게 해도 추정이니깐"
지난 13일 출입기자들과의 정례 간담회 자리에서 강신명 경찰청장이 내뱉은 말이다.
경찰은 고(故)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시신 발견 직후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메모 존재를 확인하고도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다 경향신문의 성 전 회장 녹취공개를 앞두고 검찰 측 발표가 나오자 뒤늦게 메모의 존재를 확인해 주었다.
이런 가운데 진행된 간담회에서 강 청장에게 제일 먼저 던져진 질문은 성 전 회장의 사망 시간이었다. 강 청장은 "오전 9시30분에서 10시 사이에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즉답했다.
경찰은 검찰의 지휘에 따라 성 전 회장의 사망 당일 행적을 보강 수사 중이다. 중요한 변사 사건의 경우 검찰이 여러 차례 경찰에 수사 지휘를 내리는 경우가 있다.
그 후에는 '시신 발견 직후 메모의 존재를 확인했고, 당일 밤 10시30분께 유족 측과 함께 내용까지 파악했지만 검찰이 수사 중인 사건이라 보안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진실을) 은폐할 의도는 없었다. 사망 이후 발견해 유감스럽다'는 입장도 분명하게 밝혔다.
그렇게 강 청장은 40분 가량 기자실에 머물며 경찰을 둘러싼 숱한 논란을 수습해갔다.
하지만 간담회가 끝나갈 무렵 수사 관계자의 황당한 요청이 나왔다. 강 청장의 답변과 달리 성 전 회장 사망 추정 시간을 오전 7시에서 10시 사이로 보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부검 없이 검안으로만 추정한 것이라 사망 시점을 압축하기가 다소 어려운 점을 근거로 내세웠다.
검안은 의사가 사후경직 상태 등으로 사망 원인이나 시간을 밝히는 작업이다. 변사 사건의 경우 부검 등 수사를 거치면서 처음 산출했던 사망 시점과 달라지는 경우는 종종 있다.
경찰의 태도가 보강 수사 과정에서 이미 발표한 사망 추정 시간보다 현저하게 차이가 날 것을 염려한 것일 수 있다. 이 경우 당초 부실수사가 이뤄졌다거나 중대 사안에 대해 성급히 언론에 발표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어서다.
강 청장도 수사 관계자의 말을 거든답시고 서둘러 '추정'이라는 점을 강조하려고 말을 꺼낸 것이다.
하지만 이미 한 차례 핵심 정보인 메모의 존재를 빼먹어 불신을 좌초했던 터라 '불순(不純)'한 의도로 비춰질 수 밖에 없다.
예컨대 폐쇄회로(CC)TV 포착과 전화통화 시각 등을 뒤바꾸거나 아예 사망 시점을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낼 수 있는 기반이나 빌미를 만들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살 수 있다.
혹여 성 전 회장이 숨지기 직전 여권 핵심인사와 전화통화한 사실이 밝혀졌을 때, 사망 시각과의 간격을 벌려줄 수 있단 얘기로도 통한다.
언론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여긴다는 오해도 받을 수도 있다.
취재 과정에서 기자와 만난 시민단체 소속 변호사는 "언론 보도가 없었다면 수사당국이 해외자원개발 비리 연루 의혹만 키운 채 억울함을 못 견딘 성 전 회장이 단순 자살한 사건으로 묻힐 수 있었다"고 말한다.
'살아있는 권력'을 상대로 검·경의 수사가 제대로 될 수 있을 지 상당수 국민이 의구심을 갖는 상황에서 갖가지 억측을 낳게끔 자초하는 경찰의 처신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