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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경북신문

‘태정관지령’ “울릉도는 있고, 독도는 없다” 해괴망측..
오피니언

‘태정관지령’ “울릉도는 있고, 독도는 없다” 해괴망측한 日의 사료해석 날조,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상)

이재욱 기자 입력 2020/07/06 20:21 수정 2020.07.06 20:24
                  최 장 근                          대구대 일본어과 교수                  독도영토학 연구소장
                  최 장 근                          대구대 일본어과 교수                  독도영토학 연구소장

 

1987년 교토대학 호리 카즈오(堀和生)교수가 “다케시마(竹島 ;울릉도)와 그 외 1도(外一島 ;독도)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점을 명심하라”라고 한 ‘태정관지령’을 공개했고, 그후 부속지도인 ‘기죽도약도(磯竹島略圖)’도 공개되어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영토임이 분명히 확인되었다.
이것은 1877년 일본 메이지정부가 지적을 편찬하는 과정에 시마네현이 울릉도와 독도의 소속을 문의한 것에 대한 태정관의 답변이었다.
이미 그 이전부터 태정관은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즉, 1875년 태정관(太政官) 소속의 지지과에서 관찬 지리지인『일본지지제요(日本地誌提要)』를 편찬하여 “○ 이 주(州)의 부속 섬은 치부군 45개​. 아마군 16개. 수키군 75개. 오치군 43개. 합계 179개. 이를 총칭해 오키의 소도(小島)라고 한다.” “또한 서북 방향에 마쓰시마(松島; 독도)-다케시마(竹島; 울릉도) 두 섬이 있다. 지역민들이 전하고 말하기를, 오치군의 후쿠우라항으로부터 마쓰시마에 이르는  해로 약 69리 35정. 다케시마에 이르는 해로는 약 100리 4정 남짓. 조선에 이르는 해로는 약136리 30정”이라고 하여 “이 주의 부속 섬은 ... 합계 179개”이고, 지리적으로 서북방에 ‘마쓰시마(독도)-다케시마(울릉도)-조선’이 있다고 했다.
태정관(1868-1885)은 국가최고기관으로서 지금의 내각부에 해당한다. 
따라서 메이지정부는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영토로 인정했었다. 
1987년 ‘태정관(太政官)지령’이 세상에 공개되었을 때, 줄곧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주장했던 일본정부는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그러나 지금은 뻔뻔스럽게 “시볼트의 영향으로 죽도도 울릉도이고, 송도도 울릉도”이라고 하여 잘못된 서양의 일본지도를 핑계삼아 논리를 날조하여 ‘태정관지령’의 “죽도(울릉도)와 그 외 1도(송도; 독도) 모두 울릉도”로서 ‘태정관지령’은 독도 영유권과 무관하다고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부정하고 있다.
에도시대의 올바른 전통적인 일본지도는 안용복사건을 계기로 독도와 울릉도가 조선영토로 표기되었다. 
1696년 도해금지령이 내려졌을 때, 1775년 나가쿠보 세키스이(長久保赤水)는 울릉도·독도를 일본영토로 표시한 '신각일본여지노정전도'의 관허를 막부에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1778년 이를 수정하여 울릉도·독도를 일본 영토 처럼 채색하지 않고 경·위선 밖에 두는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를 막부로부터 허가받았다.
이처럼 1875년 태정관이 제작한『일본지지제요』도 조선 동해안에 한국영토로서 울릉도와 독도 2섬을 그렸다. 그런데 1696년 울릉도 도해금지령이 내려진 이후, 19세기 서양 함선이 조선동해안에 진출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측량하고 서양식 호칭을 만들었다. 그때 잘못 그려진 서양지도의 영향으로 당시 일부 일본지도에는 위도 표시가 실제와 다른 울릉도와 독도가 그려졌다.
그런데 현재 일본은 독도가 한국영토라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일본지도의 조선동해안에 그려진 2개 섬은 시볼트 지도의 영향으로 위도는 다르지만 모두 울릉도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울릉도의 명칭을 혼란에 빠트렸다고 하는 시볼트의 ‘일본지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즉, 서양인들은 조선동해상에서 독도보다 먼저 울릉도를 발견했다. 
1787년 프랑스 탐험가 라 페루즈(la Perouse)는 서양인으로 처음 울릉도를 발견하고 북위 37도32분, 동경 130도 56분이라고 경위도를 정확하게 표기하고, 다줄레(Dagelet)이라고 호칭했다.
그런데 1789년 영국 선박 아르고노트(Argonaut)호는 울릉도를 발견하고 아르고노트 섬이라고 명명하고, 울릉도의 경위도를 북위 37도32분, 동경 129도50분이라고 잘못 표기했다. 
그 즈음에 이를 바탕으로 그려진 서양지도에는 동해상에 두 개의 울릉도(다줄레 섬과 아르고노트 섬)가 그려졌다.
그 후 독도도 발견되어 서양식 명칭이 만들어졌다.
1849년 프랑스선박 리앙쿠르호가 리앙쿠르 락스(Liancourt Rocks)이라고 명명했고, 1855년 영국군함 호르넷호가 북위 37도 14분, 동경 131도 55분에 위치한 섬을 호르넷(Hornet)섬이라고 호칭했다. 1854년 러시아군함 팔라다(Pallada)는 올리부차(Oliwuz ; 남도, 서도)와 메넬라이(Menela ;여도, 동도)라고 명명했다. 서양인들이 지금의 독도를 발견하기 이전에는 서양지도에 2개의 울릉도가 표기되었으나, 1847년 처음으로 독도가 발견된 이후 독도의 위치가 명확해져 위도 상으로 잘못 표기된 아르고노트섬이 서양지도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먼저, 두 개의 울릉도가 그려진 서양지도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즉, 1815년의 톰슨(Thomson) 지도와 1835년의 워커(J.C. Walker) 지도는 동해에 아르고노트 섬과 다줄레 섬 두 섬을 그렸다.
그러나 1811년 애로스미스(Arrows
mith)가 제작한 지도에는 아르고노트 섬과 다줄레 섬을 그리고 아르고노트 섬 아래에 “측량을 잘못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표기되었다.
1829년 영국해군 지도에는 아르고노트 섬의 존재가 의문스럽다는 의미로 점선으로 표시되었다.
1856년의 페리제독의 지도에는 "아르고노트 섬은 현존하지 않음"이라고 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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