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울릉도에서는 독도가 보이지만, 일본의 오키섬에서는 독도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1905년 러일전쟁 중에 독도를 침탈할 의도로 ‘시마네현 고시40호’로 편입조치를 취하기 이전에는 독도를 한국영토로서 인정하였다. 그리고 한국측의 많은 고문헌에 의해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임이 증명된다. 그 중에서도 ‘고려사’(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와 더불어 ‘신증 동국여지승람’이 가장 오래된 증거자료들이다.
‘신증 동국여지승람’(1531년)의 기록은 먼저 ‘고려사’(지리지)(1451년)에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에 신라 때 우산국이라 불리었던 섬은 무릉이라고도 하고, 우릉이라고도 하는데, 지방 1백리이다.” “일설에 의하면, 우산도와 무릉도는 원래 2섬인데, 2섬은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바람이 부는 날, 날씨가 청명하면 바라볼 수 있다”라고 했다.
이를 수정한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서는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2섬이 현의 정동(正東) 해중(海中)에 있다. 2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에 우산국(于山國), 또는 울릉도(鬱陵島)라 하였다.”라고 했다. 이를 수정한 ‘신증 동국여지승람’에서는 ‘팔도총도’에 울진현의 정 동쪽 바다에 ‘우산도와 울릉도’ 2섬을 그렸는데, 우산도는 서쪽에, 울릉도는 동쪽에 그렸다. 이상 3종류의 지리지의 공통적인 특징은 모두 ‘우산도-울릉도’순으로 2섬을 나열했다는 것이다.
상기 3유형의 지리지는 연도순으로 그 다음에 집필된 지리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산도(독도)에 대한 인식은 제각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고려사’(지리지)에서는 울릉도(신라의 우산국)를 중심으로 기록을 했지만, 일설에는 “우산도와 무릉도 2섬이 있다”고 하여 우산도의 존재를 삽입하여 <확인된 1도와 2도의 존재 가능성>을 표현했다. 이를 수정한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본론에서 적극적으로 우산도와 무릉도 2섬이 울진현 정 동쪽 바다에 있다고 하여 실제로 울릉도와 우산도가 존재하는 섬으로써 기록하여 <확인된 2도>를 표현했다.
이를 수정한 ‘신증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본론에 울릉도에 대해 기록하고, 우산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 없이 2도가 존재한다고 표현하고, ‘일설에는 2도는 원래 1도’라고 하여 <2도(1도 확인)의 존재를 언급하면서 1도일 가능성이 있다>고 표기했다.
신라 우산국과 고려시대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울릉도에서 바라다 보이는 무인고도(孤島)인 우산도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정확했다. 그런데 울릉도를 비워서 관리한 조선시대에는 새로운 지리지를 집필할 때 새로운 정보를 추가하지 않는 한, 연대순으로 가장 오래된 지리지가 가장 실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역으로 시간이 가장 오래된 지리지 일수록 불필요한 수정이 가해져 실제와 다른 내용으로 변질 될 수도 있었다.
‘고려사’(지리지)가 1451년에 집필되고 그 3년 후 1454년에 ‘세종실록’(지리지)가 집필되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은 1530년 집필되어 ‘세종실록’(지리지)보다 76년 후에 집필되었다. 인식적으로 ‘신증 동국여지승람’보다는 ‘세종실록’(지리지)나 ‘고려사’(지리지)가 사실에 더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신증 동국여지승람’에서 ‘우산도(독도)’의 기록에 대해 살펴보자. 즉, 조선 중종 25년(1530)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간행되어, ‘권45 : 강원도편’ 지도 ‘팔도총도’에 “동해를 동해대저(東抵大海: 동쪽의 큰 바다)라고 하고, 우산도(于山島)와 울릉도(鬱陵島) 2도를 그렸는데, 우산도는 울릉도의 서쪽에 울릉도보다는 약간 작은 크기로 그렸다. 또한 ‘울진현 산천조(山川條)’에는 “무릉(武陵)이라고도 하고, 우릉(羽陵)이라고도 하는 2도가 울진현의 정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세 봉우리가 곧게 솟아 하늘에 닿았는데 남쪽 봉우리가 약간 낮다.
바람과 날씨가 청명하면 봉우리 머리의 수목과 산 밑의 모래톱을 역력히 볼 수 있으며 바람이 좋으면 두 섬은 이틀이면 가히 닿을 수 있다. 일설에는 우산․울릉이 원래 한 섬으로써, 지방이 1백 리라고 한다.” “세종 20년(1438년) 울진현 사람 만호(萬戶) 남호(南顥)를 보내어 수백명을 데리고 가서 도망해온 백성들을 수색하여 김환(金丸) 등 70여 명을 잡아 돌아오니까 그곳의 땅이 그만 비워졌다.” “성종 2년(1471)에는 따로 삼봉도(三峯島)가 있다고 알리는 자가 있어, 박종원(朴宗元)을 보내어 찾아보게 하였는데, 풍랑으로 인해 배를 대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 갔던 배 한 척은 울릉도에 정박하였다가, 큰 대나무와 큰 복어를 가지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섬 중에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다.”라고 하여 동해에 2도의 존재를 기록했다.
첫째, “팔도총도”에 우산도(于山島)와 울릉도(鬱陵島)를 그렸고, 우산도를 울릉도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서쪽에 그렸다는 것은 울진현에서 바라다 보이는 섬이 울릉도임에도 불구하고 우산도를 서쪽에 그렸다는 것은 당시 우산도의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 우산도를 울릉도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그린 것은 울릉도의 존재는 명확하였지만 우산도의 형상에 대해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둘째, “무릉(武陵)이라고도 하고, 우릉(羽陵)이라고도 한다. 두 섬이 울진현 정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라고 하여 울진현 정 동쪽 바다 한가운데 우산도와 울릉도(무릉 혹은 우릉)라는 2개의 섬이 조선의 영토임을 명확히 표기했다.
셋째, “세 봉우리가 곧게 솟아 하늘에 닿았는데 남쪽 봉우리가 약간 낮다. 바람과 날씨가 청명하면 봉우리 머리의 수목과 산 밑의 모래톱을 역력히 볼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서 보았다는 것이 없다는 것은 울진현에서 울릉도를 바라다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2섬 중 바라다 볼 수 있는 섬이 우산도인지, 울릉도인지에 대해서도 명확히 밝히지 않았지만, 실제로 울진현(강원도)에서 바라다 보이는 섬은 울릉도이다.
즉 다시 말하면 분명히 동해에 2개의 섬이 존재한다는 인식 아래, 울진현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울릉도의 존재를 확인한 것임에 분명하지만, 우산도의 존재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 ‘신증 동국여지승람’이 집필된 1530년 시점에서 우산도(지금의 독도)는 울릉도 동남쪽 87.5km에 위치하고 있었고, 127년(1403년부터 울릉도를 비워서 관리)동안 울릉도에 사람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우산도(독도)의 존재가 베일에 가려져서 그 위치나 형상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이다.
넷째, “바람이 좋으면 두 섬은 이틀이면 가히 닿을 수 있다.”라고 하여 동해에 2개의 섬이 존재함을 명확히 표기했다. 하지만 울릉도와 우산도 2섬 간의 거리에 대해 명확히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2섬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바라볼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2일 만에 닿을 수 있는 섬이 울릉도인지, 우산도인지, 명확히 하지 않았다는 것은 울릉도는 울진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섬이기 때문에 그 위치와 형상을 명확하게 잘 알 수 있었지만, 우산도의 위치나 형상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다섯째, “일설에는 우산․울릉이 원래 한 섬으로써 지방이 1백 리라고 한다.”라고 하여 보편적 인식으로 동해에 2개의 섬이 존재한다는 것이었지만, 혹자는 우산도와 울릉도가 동일한 섬으로써 1도라고 말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라고 한다”는 것은 울릉도와 우산도에 관한 기록이 전해들은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다시 말하면 1530년 시점 조선조정의 관찬문헌인 지리지에 동해바다에 2개의 섬이 존재한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지만, 1도밖에 없다고 기록한 지리지도 있었다는 것이다.
여섯째, “세종 20년(1438년)에 (중략) 그곳 땅이 그만 비어졌다.” “성종 2년(1471년)에, 따로 삼봉도(三峯島)가 있다고 알리는 자가 있어, 박종원(朴宗元)을 보내어 찾아보게 하였는데, 풍랑으로 인해 배를 대지 못하고 돌아왔다.”라고 하여 1438년 울릉도는 완전히 비워졌고, 박종원을 보내어 풍랑으로 배를 댈 수 없는 섬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바로 풍랑으로 배를 댈 수 없는 섬인 삼봉도(지금의 죽도(죽서)는 세 봉우리가 없음, 지금의 독도는 세 봉우리로 보일 수도 있음)가 우산도(지금의 독도)임에도 불구하고, 우산도를 울릉도 주변의 섬으로써 사람이 살 수 있는 큰 섬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조선조정이 1403년부터 1438년까지 울릉도를 완전히 비워서 관리하기 이전이었던 고대우산국과 고려시대에는 울릉도 사람들은 보이는 거리에 있는 우산도의 존재를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동해에 2개의 섬이 존재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530년 ‘신증 동국여지승람’이 집필되던 시점은 울릉도의 거주민을 쇄환하여 섬을 비워 관리한지 130여년이 지났지만, 그 시점에서도 동해에 2섬이 존재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울릉도의 존재는 명확했지만, 우산도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울릉도와 우산도가 동일한 섬일 수도 있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죽도문제연구회는 ‘신증 동국여지승람’의 사료적 가치를 폄훼하기 위해 우산도는 지금의 독도가 아니라고 다음과 같이 사실을 날조하여 선동하고 있다.
첫째, 한국정부는 <‘세종실록’(지리지)의 "보인다"를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인다"이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도 동일하게 "맑은 날에는 역력 보인다"라는 기술이 있는데 “역력히 보인다”는 울릉도를 관할하는 울진현에서 울릉도가 '보인다'라고 읽는 것이 옳다.> 그래서 <후세의 ‘여지도서(輿地図書)’‘대동지지(大東地志)’의 본문에서 우산도가 사라졌다.> 라고 하여 울릉도와 우산도가 동일한 섬이라고 사실을 날조했다.
둘째, 한국정부가 <‘세종실록’(지리지)에 의거하여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인다는 사실과 함께, 우산도가 우산국에 소속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우산도에 관한 기술이 애매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우산도는 오늘날의 독도가 아니라고 사실을 날조했다.
셋째, 한국정부는 <그 위치가 애매한 우산도와 실제로 "독도는 맑은 날에는 울릉도에서 육안으로도 볼 수 있다"고 하는 지리적 여건을 결합하여 지리적 여건에 의해서 ‘세종실록’(지리지)의 "보인다"를 해석하는 앞뒤가 바뀐 논법을 생각해낸 것이다.>라고 하여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강원도에서 ‘우산도’(울릉도)가 보인다는 것이기 때문에 우산도는 울릉도와 동일한 섬으로써, 실제로 지리적으로 울릉도에서 보이는 ‘독도’와 우산도(울릉도)는 서로 다른 섬이라고 사실을 날조했다.
일본 시마네현의 죽도문제연구회는 한국정부에서 우산도가 지금의 독도라고 하는 것에 대해, <이는 문헌 비판을 게을리 한 결과로서, 이런 비학술적인 기법으로 "우산도가 독도라고 하는 기록은 ‘신증 동국여지승람’(1531년)등 한국의 많은 관찬사료에 보인다"라고 하여 문헌의 해석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라고 날조하여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부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