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장 근
대구대 일본어과 교수
독도영토학연구소장
독도는 원래 사람이 살수 없는 섬이기 때문에 한국은 무인도 상태로 고유영토로 관리해왔다.
그러나 일본은 불법적으로 은밀한 방법으로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입한 후, 독도의 강치를 남획하여 멸절시켰다. 현재 독도에는 독도주민, 경비대원 40여명, 독도관리사무소 공무원, 등대지기 등이 많은 한국민이 상주하고 있다.
일본이 독도의 강치를 멸절시키지 않고,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독도 점유도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독도는 강치들이 서식하는 섬, 괭이갈매기들의 섬으로써 한국민들이 무리하게 상주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일본은 한국민들이 독도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강치가 멸절된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을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일본이다.
일본은 한국전쟁 중에 주일미군에게 독도를 미공군의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하도록 하여 미공군 폭격기가 독도에 폭탄을 투하했다.
그렇다면 과연 그곳에서 살고 있던 강치들은 폭탄을 맞고서도 그대로 살 수 있었을까?
위키페디아(일본판)에 의하면, “1958년 독도 주변에 강치가 200-500두 정도가 생존했다고 보고되었다”고 한다.
일본은 독도에 서식했던 강치를 ‘일본강치’라고 명명했다.
일본강치들은 “추정컨대 1950년대 후반에 레분시마(礼文島)연안, 아오모리현의 큐로쿠시마(久六島), 시마네현의 니시노시마(西ノ島), 독도, 쿠릴열도의 스테고(捨子) 코탄섬古丹島), 캄차카반도 남부에 한정되어 전 서식지역에 최대 300두가 생존하고 있었다. 그중에 100두가 독도에서 서식하였다”라고 했다.
이것은 일본이 독도 강치의 개체수를 과장하여 한국이 강치를 멸절시켰기 때문에 독도를 영토로서 관리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위키페디아(일본판)에서는 목격담 이외에 특별한 근거도 없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51년에 독도에 50-60두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1951년 11월 돗토리현립 사카이고등하교 수산과가 독도에 갈 때 목격하였고, 1952년 의용수비대가 부산에서 강치를 팔아 소총을 구입하였고, 1953년 일본인이 울릉도에서 미역과 전복을 채취하러온 어부로부터 강치로 요리한 것을 대접받았다는 것이다. 조선전쟁 중(1950-1953년)에는 한국군이 사격훈련의 표적으로 사용했다는 소문이 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이 독도의 강치를 멸절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위키페디아(일본판)에서 강치의 분포지역에 대해 “1949년 소련의 사할린 남부 해마(海馬)도(모네론섬)에서 포획된 적이 있고, 1962년 스테코 코탄 섬에서 목격된 적이 있고, 1967년 캄차카반도에서 사체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1974년 레이분시마 앞바다에서 같은 종으로 보이는 기각류(鰭脚類) 새끼가 포획되어 사육 중 20일 후에 죽었다고 한다. 1975년 독도에서 2두가 목격된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 생식이 보고된바 없다.
세계자연보호기금(WWF)은 번식은 1972년이 마지막이었고, 포획된 개체는 한국의 동물원에서 새끼가 출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보고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강치는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일본에 의해 거의 멸절상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키페디아(일본판)에서도 일본강치의 서식 개체수가 감소된 주된 원인에 대해 “서식 환경의 변화와 남획에 의한 것이다.
모피·박제 목적의 남획, 인간의 번식지 침입에 의한 교란, 엘리뇨 현상에 따른 먹이의 분포와 서식 수 변동에 의한 가능도 생각된다.
쇠퇴·멸종의 주된 원인은 가죽과 기름을 얻기 위해 남획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독도에 대해서는 대규모 강치 잡이에 의한 남획으로 개체 수가 감소한 것이 주된 요인이다.
1950년대에는 일본으로부터 대량의 비닐제품이나 소비에트연방의 핵잠수함과 핵폐기물 투기 등 ‘일본해’(동해)가 현저하게 오염되어 서식 환경이 악화된 점도 강치 멸절의 요인으로 지적된다.
한일 양국 모두가 제2차대전 이후 남아있던 몇 안 되는 개체를 정책적으로 보호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강치는 조수(鳥獣)보호법에서도 장기간 보호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당초 한국에서도 독도 강치에 대한 보호정책을 펴지 않았다가 나중에 보호 대상으로 지정하였다. 한국에 의한 독도의 군사 요새화와 재일 미군의 군사 훈련 실시 등 군사 관계도 멸절의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독도 강치를 멸절시킨 것은 일본이 제2세계대전 이전에 대량으로 남획하였고, 태평양전쟁으로 서식환경이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독도에 경비대를 주둔시켜서 멸절되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일본이 독도 점유를 시도하거나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여 독도를 탈취하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독도에 한국의 경비대가 주둔할 이유가 없었다. 일본이 독도 강치를 남획한 증거로서, 박제형태로 일본 전국의 여러 기관에 보관되어있다. 위키페디아(일본판)에 따르면, “교토시 동물원, 구마모토 동물원(현:구마모토시 동식물원), 고베시 스와야마(諏訪山)동물원(현: 고베시립 오지(王子) 동물원), 사카이(堺) 수족관, 덴노지(天王寺) 동물원, 히가시야마(東山) 동물원(현 히가시야마 동식물원), 하코자키(箱崎) 수족관, 한신(阪神)파크 수족관에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교토시 기념동물원(현: 교토시 동물원)으로 1903년 개원 당시 오키(隠岐) 출생 2마리를 수용한 기록이 있다.
덴노지 동물원에서는 량코(독도의 일본식 속칭)대왕이라 호칭된 수컷 큰놈을 포함하여 2005년 현재 6마리의 박제 표본이 현존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는 약 10~15구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1886년 2월 시마네현 마쓰에(松江)시 미호노 세키마치(美保関町)에서 포획된 후 시마네 사범학교에서 시마네대학에 보내져 보관된 박제, 오사카시 덴노지 동물원의 6구의 강치 박제도 독도에서 포획된 것이다.
시마네현의 이즈모(出雲)고등학교 다이샤(大社)고등학교, 마쓰에 키타(松江北)고등학교에서도 일본강치의 박제(1905년 독도 출생)가 소장되어 있다.”라고 하여 독도 강치의 박제가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일본의 신문기록을 조사하여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키페디아(일본판)의 기술 중에는 1970년 독도에 50여두의 강치가 목격되었는데, 한국이 독도에 경비대를 주둔시켜 군사적으로 요새화하였기 때문이고, 또한 한국 남자들이 강치가 정력에 좋다고 식용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강치가 멸절되었다고 하는 일본 주장은 설득력이 전혀 없다.
독도 강치가 멸절된 주된 요인은 제2차세계대전 이전에 일본이 대량으로 남획하였고, 또한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강치가 서식할 수 있는 생태 횐경이 변화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