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국학진흥원이 58만여점의 소장자료 중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1847~1916)와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1851~1926) 등 한말 유학자들이 주고받은 편지 9,000여 통을 발굴했다고 19일 밝혔다.
편지 등이 실려 있는 이번 간찰첩은 인동장씨 남산파 회당고택에서 보관해오다가 2003년에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했다. 이 간찰첩들은 최근첩最近牒 65책, 어안첩魚鴈牒 18책, 통신첩 通信牒 10책 등, 총 92책이며 한 책당 100여통의 편지가 들어있으므로 약 9,000여 통의 분량이다. 편지는 주로 회당 장석영이 받은 편지이며, 표지에 보낸 사람의 성씨가 기재됐다. 인동장씨, 진성이씨, 선성김씨, 광산김씨, 경주김씨, 안동권씨, 남씨, 신씨, 류씨, 송씨, 여씨, 백씨 등 다양하다.
편지 내용의 대부분은 의병전쟁과 국채보상운동 등에 관해 각처에 보낸 통문, 시회에서 지은 시를 묶은 시축(詩軸), 학문을 강론한 강회(講會) 기록 등에 관한 것으로 그중 눈에 띄는 것은 이승희가 보낸 편지를 따로 모아둔 대계첩大溪帖이다. 이승희의 편지는 다른 간찰첩에도 수록되어있지만, 별도의 책으로 묶어둔 까닭은 두 사람의 인연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장석영은 이승희의 아버지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에게 글을 배운 제자였고, 나이 또한 비슷했기에 두 사람의 우의는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1907년에 환갑을 맞은 이승희가 2월 20일자로 장석영에게 보낸 편지 중 이런 내용이 있다. “국채가 날로 늘어나서 사사롭게 잔치를 열 수 없어 그 비용 백금百金을 의소義所에 보내고 나서 손님과 친구들을 빈 속으로 대하니 또한 스스로 부끄럽다” 이는 자식들에게 환갑에 관한 일체 행사를 금하고 그 돈을 국채보상의연금으로 기부하고, 찾아오는 손님과 친구들에게 별다른 음식을 대접하지 못해 부끄러웠다는 내용이다. 이승희는 다음 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해 교민들을 위해 공교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이승희와 장석영 두 사람 모두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 이 편지가 쓰인 시기는 대체로 개항 무렵인 1870년대부터 장석영이 사망하기 전인 1920년대 초반까지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서는 관련 연구자들이 매주 모여서 간찰을 강독 · 해석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국권을 상실했던 당시 나라를 되찾기 위해 헌신했던 선현들의 사상과 흔적이 담긴 소중한 서간문을 일반대중에게 널리 알리고자 번역작업이 마무리되면 책으로 발간한다는 계획이다. 이종팔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