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장 근
대구대 일본어과 교수
독도영토학연구소장
일본은 한해에도 10회 이상 정기, 비정기적으로 독도도발을 자행하고 있다.
2월에는 정부고관(차관급 내각부 정무관)이 참석한 시마네현의 ‘죽도의 날’ 행사, 3월에는 비정기적으로 초,중학교와 고등학교 학습지도요령(10년 간격)과 해설서(필요시 수시로) 수정, 교과서 검정 및 개정, 4월에는 외교청서 발행, 8월에는 방위백서 발행, 게다가 10월에는 한국의 ‘독도칙령의 날’행사와 년 수차례 수시로 전개되는 한국의 독도방어훈련에 대한 항의, 일본극우주의자들의 독도 영유권 주장 등, 일본은 독도를 둘러싸고 한일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의도는 “독도의 영유권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한국을 자극하여 독도를 분쟁지역화 하려는 치밀한 계략이다. 이러한 일본을 상대로 우호적인 한일관계를 유지하고, 독도 영유권을 수호해야하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근년에 들어와서 일본은 방위백서와 외교백서를 매년 발간하여 홈페이지를 통해 국제사회를 향해 독도 영유권을 선동하고 있다. 외교청서는 영문판(DIPLOMATIC BLUEBOOK)도 제작하고 있다.
외교청서는 “외무성의 외교정책과 최근의 국제정세를 이해할 수 있는 1차 자료로서, 일본을 둘러싼 국제정세와 그에 대해 어떠한 외교방침으로 대응했는지를 기술하고 있다. 한국, 북한, 중국, 러시아 등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외교청서가 일본에서 백서(white paper) 중에 유일하게 '청서(blue book)'라고 불리는 이유는 파란색 표지로 된 영국의회 외교위원회 보고서를 맨 처음 참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위백서는 “방위성의 방위정책과 주변국가에 대한 인식을 이해할 수 있는 1차 자료로서, 일본 방위의 근간이 되는 미일관계, 한국, 북한,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가의 군사적 동향, 자위대 해외파견 등 자위대의 국내외 활동이나 대원의 목소리를 담은 칼럼, 방위정책 제언 등을 주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전후 일본은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적극적인 인식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외교청서나 방위백서를 발행했을 초기에는 독도 영유권을 다루지 않았다.
일본의 패전으로 1946년1월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SCAPIN 677호로 독도를 한국이 실효적으로 관할통치하는 지역으로 구분했고, 1951년9월 대일평화조약을 체결했을 때에도 독도가 일본영토라고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반면 대일평화조약에서 실제로 한국이 관할통치하고 있는 독도에 대해 한국영토로서의 지위가 명시되지 않게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평화선을 선언하여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천명했다. 이때에 일본은 평화선 조치에 항의하여 일방적으로 대일평화조약에서 독도가 일본영토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다케시마’가 일본영토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불법으로 점거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정부는 독도가 명확하게 일본영토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일본은 외교청서와 방위백서에서 독도도발이 날로 격심해지고 있다. 먼저 외교청서에 대해 살펴보자. 언제부터 어떠한 내용으로 독도도발이 시작되었을까? 외교청서는 1957년 3월부터 발행되었는데,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에서 1962년 일본이 ‘한일협정에서 독도 영유권문제를 의제로 삼아 해결하자’고 주장했고, 한국은 ‘독도영유권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거부하자, 일본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하자’고 주장하고, 한국이 이에 거부하면서 한일 양국 간에 독도논쟁이 격화되었다. 이로 인해 1963년판의 외교청서부터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1965년 한일협정을 체결하여 양국은 근본적인 해결없이 일본이 한국의 독도 실효적 지배 상황을 인정하는 것으로 표면적인 독도논쟁을 봉합하였다.
이로 인해 1964년판과 1965년판의 외교청서에서는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1972년 5월 한국이 독자적으로 한일 해양경계 지점의 동중국해 대륙붕에서 석유 개발을 위한 광구를 설치하였는데, 여기에 일본이 이의를 제기하여 다시 독도논쟁이 표면화되었다. 이때에 양국은 독도와 상관없는 지점에 한해 1974년 1월 대륙붕을 공동으로 개발하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한편 국제적으로는 1982년 12해리 영해, 24해리 접속수역,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을 채택하는 유엔해양법협약이 체결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해양경계를 확장하기 위해 외교청서에서 한층 강도 높게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첫째, 1971년판~1987년판에는 ‘한국이 독도를 불법 점거했다’라고 표기했다. 이때는 박정희정부(1963년 12월 17일 ~ 1979년 12월 26일)와 전두환정부(1980년 9월 1일 ~ 1988년 2월 24일)시절이었다.
둘째, 일본은 1990년판~1992년판, 2000년판~2001년판, 2003년판에서는 영유권 주장을 한 단계 더 격상해서 ‘독도가 일본의 고유 영토’라고 표기했다. 1996년 2월 한국은 유엔해양법협약(1982년 채택)을 비준하고 독도접안시설을 확충했다. 이에 대항하여 일본도 같은 해 6월에 비준하고 해양경계를 확장하기 위해 한국에 대해 새로운 어업협정 체결을 요구했다. 한편 “서울 올림픽(1988년판과 1989년판),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와 김일성 사망(1993년~1996년), 한국 IMF 금융위기(1998년판과 1999년판), 한·일 월드컵 개최(2002년판)” 등으로 한·일 양국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을 때는 외교청서에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셋째, 노무현 정부(2003년 2월 25일 ~ 2008년 2월 24일)에서는 한국이 2006년 6월 독일에서 개최되는 국제수로기구 회의에 한국식 독도주변 해산의 명칭을 등록하려고 하자, 일본이 이를 막기 위해 그해 4월 측량선을 독도 근해에 파견하여 양국의 공선이 물리적으로 충돌할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연출됨으로써, 독도를 둘러싸고 한일관계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일본은 2004년판~2005년판에서는 한층 더 영유권을 강화하여 ‘독도는 역사적으로, 국제법적으로 일본의 영토’라고 표기했다.
넷째, 노무현 정부가 일본의 측량선 도발에 해산등록을 보류함으로써 양국공선의 충돌은 일단 피했지만, 일본의 독도도발에 격분하여 대일성명 발표와 함께 관광객들의 독도 입도를 허용하였다. 이명박정부(2008년 2월 25일 ~ 2013년 2월 24)에서도 동일한 기조를 유지하였다. 이때에 2006년판, 2008년판~2011년판 외교청서에서는 한층 더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여 ‘독도는 역사적으로, 국제법적으로 일본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일본의 방위백서에 대해 살펴보자. 방위백서는 1970년 제1회, 1976년 제2회가 발행된 이후 매년 발행되어왔다.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내각에서 처음으로 방위백서에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였고, 그 이후 매년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방위백서는 2006년 이전에는 외교청서와 달리 왜 독도의 영유권 주장을 하지 않았을까? 일본에서는 1945년 8월 패전과 동시에 연합국 최고사령부 사령관이 점령 통치를 감행했다. 1952년 4월 대일평화조약이 비준됨으로써 점령정치가 종료되어 일본이 정치적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1946년 일본국헌법이 제정되어 제9조 “일본은 무장한 군대를 갖지 않고, 외교적 분쟁도 무력으로 해결하지 않는다”라고 규정하여 군대를 갖지 않는다고 명시하였다.
또한 1951년 9월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이 일본의 안보를 책임진다고 규정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에 일본의 안보를 담당하던 주일미군이 한국전에 참전함으로써 안보의 공백을 메꾸기 위한 경찰예비대를 창설하였다. 한국전쟁이 종료된 후 1954년 경찰예비대는 육상자위대로 명칭을 바꾸었고, 해상보안대는 해상자위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리고 1956년 항공자위대를 새롭게 신설하여 3군체제를 완성하였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독도를 한국의 방공식별구역 내에 두었기 때문에 미일안보조약에 의한 일본의 방위구역에는 독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5년 고이즈미 내각부터 줄곧 방위백서에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2021년판 방위백서에는 “우리나라(일본) 고유영토인 북방영토(쿠릴 남방 4개 섬)와 다케시마(독도)의 영토문제가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존재한다”라고 하여 외교청서와 동일하게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현재 일본은 매년 외교청서와 방위백서를 발간하여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데, 외교청서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63년부터 지금까지 영토내셔널리즘의 강화와 더불어 점차로 독도의 영유권을 강화해왔다.
반면 방위백서에서는 근래에 들어와서 2006년부터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외교청서와 방위백서의 공통되는 특징은 한일관계가 원만할 때에는 일본의 독도도발은 약화되었고, 한일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일본의 독도도발이 강화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우리의 과제는 원만한 한일관계와 독도의 영유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일본을 상대로 독도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적으로 한일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선결과제라는 사실을 명심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