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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경북신문

萬波息笛 만파식적 - 살아 있다는 위대함..
오피니언

萬波息笛 만파식적 - 살아 있다는 위대함

일간경북신문 기자 gbnews8181@naver.com 입력 2022/05/10 17:24 수정 2022.05.10 17:25

정 여 산<br><자유기고가>
정 여 산
<자유기고가>
잔인한 4월을 보내고 맞은 5월 첫 날 잔인한 소식이 날아 들었다. 신속항원검사 양성 반응 코로나 확진이다. PCR 검사를 해 보면 결과가 바뀔 것 같은데 서둘러 판정을 때려 버리는 관계 당국 처사가 괘씸하다. 약은 공짜로 주고 먹고 안 나으면 더 지어준다고 한다. 3차 부스터 샷에 독감 예방주사까지 네 차례에 걸쳐 독을 주입했으니 면역체계가 갖춰졌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필 정부 방역지침 풀리는 날에 걸리다니 수퍼 유전자나 태양천골지체라는 허언은 안 들어도 되겠다.
우한 폐렴이 대구 신천지 교단을 박살낼 무렵 칼럼(대경일보,‘20년 2월 5일자)에서 ‘아무리 악이 발악을 해도 인간의 선한 의지를 이길 수는 없고, 가족간, 동료간, 이웃간 수많은 사랑의 에피소드가 탄생할 것’이라 장담했다. 중국 국적 아내가 한국 행 전세기에 탑승 못하자 한국인 남성이 아내와 함께 죽음의 땅에 남기로 한 기사가 많은 이들을 울먹이게 했다. 그 부부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인간들은 과연 이 흉악한 바이러스 악마에 대항하여 서로 온기를 나누었을까. 나는 얼마나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을 돌아보았던가. 리트머스 시험지에 두 줄이 선명하게 그어진 마당에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전염된 사람이 많지 않을 때 확진자 발생 뉴스라도 나면 먼 나라 불가촉 천민을 대하듯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소독하고 야단을 떨었다.
직장에서는 걸리면 완전 죽일 놈 되어서 사표를 내야할 지 고민해야 했었다. 감기 정도로 등급이 내려앉은 지금도 주변에 송구스럽다는 인사치레를 해야 할 정도니 초창기엔 오죽했으랴. 온 세상을 휩쓴 괴질로 곳곳에서 약한 것들이 맥없이 드러나 쓰러져 갔다.
허술한 국가 방역체계, 놀기 좋아하는 나라 국민들의 안일한 대응, 보건 및 경제 당국의 정책 혼선, 집단 종교시설의 무개념 관리시스템, 너무나 인간적이지 않은 노동 환경 등. 국가, 경제, 사회 체제뿐 아니라 개인도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모든 약한 부분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3차 부스터 샷을 맞았을 때는 몇달 전 화장실에서 넘어진 왼쪽 등이 쑤셔 왔고, 이번에는 무릎 관절과 평소 찜찜하던 여기 저기에서 이상신호가 나타났다. 사악한 균이 들어와서 못견디겠다고.
육체의 약한 부분보다 정신의 나약함이 더 큰 문제다. 자기 연민, 자기 혐오, 우울감 등 나쁜 요소들이 격리기간 내내 칼 군무를 추었다. 찢어지는 인후통증과 눈이 시리고 코가 얼얼하고 가래가 컥컥 끼는데 히죽거릴 사람이 어디 있을까만 수면 장애까지 겹쳐서 ‘울감’ 모드를 종료할 장치가 아예 작동하지 않는다. 특별휴가로 그냥 뒹굴어도 되지만 눈치가 보여 재택근무를 자원했다. 처음 이, 삼일 간은 영육간에 피로감이 극에 달했다. 웃음 짓는 안면 근육이나 신경이 너덜너덜해져(거의 마비되어) 미소가 사라졌음을 깨닫자 통증보다 더 큰 슬픔이 밀려왔다.
‘의무 격리’라는 구청 메시지가 거북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다지 세상과 교류가 많다고 할 수도 없다. 산에서 칡넝쿨 파먹는 자연인은 아니지만 ‘정상적’ 혹은 ‘평균적’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은 아무리 해도 들지 않는다. 보통의 삶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때 맞춰 승진해서 부하들 거느리고 떵떵거리는 삶일까. 그런 사람이 많을까 사원으로 정년 퇴직을 하거나 구조조정으로 떠나는 경우가 많을까 통계를 찾아보기도 귀찮다.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는데 세 끼 밥 먹고 가족들 곁에서 건강하게 지내는 게 은총임을 잘 알고 있다. 할 일이 있다는 걸 고마워하라는 선배들 경고도 귀담아듣고 있다. 유력한 신문 지면에 어쭙잖은 생각을 칼럼으로 공유하고 있으니 그만하면 괜찮은 인생 아니냐는 위안도 틀린 말은 아니다.
어느 정도 통증이 가시자 며칠을 허송했다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모처럼 여유시간을 좀더 유익하게 보냈으면 좋았을 걸 하는 본전 생각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욕심이다. 코로나로 죽는 사람이 셀 수 없는데, 당뇨 기저질환자가 흉악한 바이러스와 싸워 살아 남았으면 대단하지 않은가. 죽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은 왜 모르는 것일까. 주어진 생명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대체 무슨 오만인가.
신으로부터 배달된 “오늘”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언박싱하는 일상은 얼마나 고귀한가. 코로나 걸렸다 나은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남들이 무시하더라도, 돌아온 탕자 맞이하듯 스스로를 대견스레 대해 주는 것도 괜찮겠다. 축배를 들고 자신에게 선물도 하고 잔치를 벌여도 되겠다. 세상 어떤 일이 전부 나쁜 것만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일주일간 죽다가 살아났으면 뭐라도 득이 된 게 하나는 있을 것이다. 아니 있어야 한다. 없으면 찾아내서 만들어야 한다. 아픈 만큼 성장도 하고 인생관도 바뀌었을 것이다. 찌질 투덜 어리광 냉소적인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고 한 번뿐인 인생 폼 나고 멋지게 살다 가야지. 부귀든 명예든 권력이든 죽을 때 가지고 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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