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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시즌에 읽을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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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시즌에 읽을 책들

일간경북신문 기자 gbnews8181@naver.com 입력 2022/08/02 17:07 수정 2022.08.02 17:08

정 여 산<br><자유기고가>
정 여 산
<자유기고가>
휴가 시즌이다. 무더위와 일상의 치열함, 지겨움을 피해 인간은 쉬어야 한다. 바빠서 소홀했던 가족들과 함께 하는, 혹은 얽히고 설킨 관계를 벗어나 홀로 잠기는 시간이다. 긴 교통 체증 행렬에서, 버스나 기차, 혹은 펜션 벤치에서 읽을 것들을 찾게 된다. 한 페이지도 펼쳐 보지 못하고 그대로 되가져 오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여행 반려 서적들이 있다.
레고, 퍼즐, 카드를 챙기면서 몇 번을 시도하다 못 읽은 고전이나 지인들이 추천한 에세이, 소설도 가방에 담게 된다. 대부분 가벼운 내용이지만 때로는 베르그송이나 버나드쇼 풍의 묵직한 책들도 더러 눈에 띈다. 삶이 지루하거나 육체 보다는 정신을 혹사시키는 ‘하드 보캐이션’에 필수품이다. 자전거나 등산으로 땀을 흘리는 것처럼 무겁고 어려운 주제와 지끈지끈 씨름하는 것도 휴가의 즐거움이다.
짜증나고 구질구질한 삶을 걷어차버릴 인정머리라고 찾아볼 수 없는 서늘한 문장이 그리울 때면 두 말할 나위 없이 김훈 작가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는 금속이 들려 주는 수려하고 웅장한 교향곡이다. 소설 ‘개’는 요즘 거의 사람으로 둔갑하고 있는 반려견의 눈에 비친 세상을 소개하고 있고, ‘달 너머로 달리는 말’에서는 문명의 시원성과 암수 자웅의 애틋한 사랑을 말(馬)의 입을 통해 들려 준다. 나츠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는 또 다른 재미를 전해 주는 동물성 문장이다.
김호연 작가가 능청스레 빚어내는 문장들은 시원하고 맛깔스럽다. 열무 냉면 같은 ‘불편한 편의점’이나 시원한 콩국수 같은 ‘망원동 브라더스’는 후루룩 들이켜지는 소설이다. 노숙자로 전락한 의사의 대반전 스토리나 사회적 잉여 남성들의 눈물겨운 에피소드들은 원두막에서 먹는 수박 화채처럼 청량감을 더해 준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는 6070 세대들에게 동지 팥죽처럼 다가올 것이다. 개발 주도 세대들의 막무가내에 항변도 못하고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들을 챙기며 헝클어진 삶을 다시 한번 가지런하게 하는 시대적 가이드북이다. 두꺼운 책 한 권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로 이어지는 황당함에 너털 웃음을 짓게 될 것이다.
김영하의 ‘작별인사’는 2030 세대들이 다가올 미래 세상을 가늠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람인줄 알고 살아가는 주인공 철이가 휴머노이드라는 설정은 아이덴티티라는 것에 혼란을 겪고 있는 요즘 젊은이들이 공감할 만하다. 세계적 미디어가 우리 청춘들이 MBTI를 과신한다고 비판하는 요즘 세상에 한 번쯤 읽어보길 추천한다. 특히 이공계 젊은이들이 이 책에 어떤 소감을 갖는지 함께 나눠보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글들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이즈의 무희’(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컬러풀 회화적 묘사로 평가되고 있지만 ‘채식주의자’가 훨씬 흥건하고 낭자하게 채도가 높다. 삼겹살 대신에 샐러드를 즐기는 비건들의 신념을 응원할 탄탄한 지침서이다.
비소설류도 휴가 때 많이 읽힌다.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인도 철학의 정수를 소개하고 있다. 도쿄 올림픽 여자 양궁 2관왕에 오른 안산 서수가 강한 멘탈과 집중력의 에너지를 이 책에서 얻었다고 한다. 포기하고 싶은 고난과 역경에도 꿋꿋이 견뎌낼 힘이 우리에게 있다. 스스로가 끝이라고 선언하기 전에 절대로 끝난 게 아니다. 쉬고 다시 충전을 해서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그 길을 끝까지 가야 한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는 벽돌 한 장 보다 무거운 아메리카 인디언 연설문집이다. 앞의 책과 마찬가지로 류시화 작가가 편집했다.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 팔 수가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 판단 말인가.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소유 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 팔 수 있겠는가. 햇살 속에 반짝이는 소나무들, 모래사장, 검은 숲에 걸려 있는 안개, 눈길 닿는 모든 곳, 잉잉대는 꿀벌 한 마리까지도 우리의 기억과 가슴속에서는 모두가 신성한 것들이다.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 취직이 안되고 청약에서 떨어지고 주식과 비트 코인이 곤두박질하는 천민 자본주의 세상에 함몰되어가는 지친 영혼들에게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벗어버리고 온 몸으로 자연을 느껴보라는 울림이다.
동영상 대세라는 말을 듣지만 나는 아직도 활자가 더 편하고 문자에게 더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사카모토 류이치 ‘마지막 황제’, ‘레인’은 우리 몸 모든 감각을 리셋하고, 빌 에반스 ‘왈츠 포 데비’ 또한 의식의 흐름을 가지런히 해주는 효과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는 출판계 탄식 사이로 휴가 떠나는 손에 아직도 책들이 쥐여지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젊은 손에 어떤 책이 들려지느냐 하는 것은 어떤 운명이라 하지 않았던가. 세월에 부르트고 주름 진 손에 쥐여진 낡은 책이 그 사람 일생을 얼마나 기품 있게 만드는지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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