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정책 핸들'을 쥔 한국은행의 셈법이 복잡해졌다. 10년7개월 만에 한·미 기준금리 역전으로 한은이 쓸 수 있는 통화정책 운신의 폭이 더욱 좁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에 금리를 추월당했다고 해서 한은이 바로 금리를 따라 올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경제의 기초체력을 감안할 때 어느 정도 버틸 여력은 있다. 국내 경기 여건도 금리를 올릴 만큼 충분히 무르익지 못했다. 저물가도 눈에 밟히고, 미국의 보호무역조치 강화 등 경기 불안 요인도 곳곳에 있다.
그렇다고 내외금리차가 벌어지는 것을 마냥 보고 있자니 한은으로서는 부담이 크다. 당장에야 외국인 자금유출 가능성이 적지만 금리역전 현상이 장기화되거나, 앞으로 역전 폭이 벌어지면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커질 수 있어서다. 결국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가는 것은 경계하면서도, 경기 회복세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아야 하는 고도의 통화정책을 펼쳐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22일 한은과 금융시장 등에 따르면 한·미 기준금리가 역전된 것은 이번이 세번째다. 지난 1999년 6월~2001년 2월, 2005년 8월~2007년 8월까지 두차례 역전된 바 있다. 이후 10년7개월만에 다시 역전된 것이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21일(현지 시간) 연 1.50~1.75%로 금리를 올렸다. 우리나라 금리(연 1.50%)보다 미국 금리 상단이 높아졌다.
한·미 금리역전으로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국내에 유입된 외국인 투자자금 유출 가능성이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갈 위험은 적다는 게 중론이다. 과거 금리 역전기에도 자본 유출 현상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LG경제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오히려 금리가 역전된 두 시기에 각각 147억달러와 75억달러의 자본 순유입이 나타났다.
그러나 역전 기간이 장기화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내외금리차가 벌어진 상태에서는 금융시장이 대내외 충격에 더 취약해진다. 지금은 잠잠해졌지만 북한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다시 불거지거나, 신흥국 금융시장에 돌발 변수가 생기면 국내 금융시장에서 외국인 자금이 급격히 빠져나갈 위험은 커진다.
한은도 한·미 금리역전이 길어질 가능성을 가장 경계한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전날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한·미 금리역전 폭이 크거나 장기화될 경우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며"(미국) 금리를 따라갈 경우 가계부채 부담 문제가 생길 수 있고, 실물 경기는 성장세가 그대로 가야만 지탱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국내 경기 여건만 보면 한은이 금리인상에 속도를 내기 힘든 상황인 반면 미국의 금리인상은 빨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올해 3회, 내년 3회의 금리인상을 예고한 미국의 '점도표'에 비춰 감안하면 내년말 미국 금리는 2.75~3.00%까지 올라간다. 한은은 올해 1~2회 금리인상에 그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 속도대로라면 내년에도 한·미 금리역전 현상은 계속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자본 유출을 우려해 한은이 금리를 올리려고 해도 부담이 뒤따른다. 자칫 가계의 이자부담을 늘려 소비심리 하락 등으로 경기 회복세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 가계빚은 지난해말 기준 1450조원을 넘어섰는데, 대출금리는 미국의 시장금리를 따라 이미 오름세에 놓였다.
좀처럼 오르지 않는 물가상승세에 대한 걱정도 크다. 지난달 금융통화위원회 의사록에 따르면 대다수 금통위원들은 물가 오름세가 예상보다 둔화된 것으로 진단했다. 금통위원들은 저물가가 지속되는 이유 중 하나를 내수 회복세가 미약하기 때문으로 봤다. 한은의 물가상승률 목표치는 2.0%인데 지난 1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은 1.0%, 근원물가상승률은 1.2%로 둔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복잡한 금리 셈법에 시장에서도 한은의 금리인상 시기를 꼭 집어 가늠하기가 쉽지 않은 모습이다. 자본유출 위험을 우려하는 쪽에서는 이르면 5월 금리인상 가능성을 전망하고 있다. 금리인상 횟수도 2회로 내다본다. 국내 경기 회복세에 불안한 시선을 보내는 쪽에서는 하반기 금리인상이나 시기와 상관없이 1회 금리인상을 예상하고 있다.
공동락 대신증권 연구원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한은의 금리 인상 횟수를 놓고 1회와 2회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며 "총재 연임 이후 처음 열리는 4월 금통위에서 경제전망 경로의 변화를 다시 짚어 판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창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