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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경북신문

태극기와 의병 그리고 영국기자 애국이란…..
사회

태극기와 의병 그리고 영국기자 애국이란…

운영자 기자 입력 2014/08/26 21:27 수정 2014.08.26 21:27

올해 3·1절, 정부는 캐나다 태생 영국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수훈자는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1869~1931) 기자다.
매켄지가 영국 런던 데일리메일(1896년 창간) 신문의 특파원으로 대한제국의 땅을 밟은 것은 1904년이다. 러·일 전쟁 취재차 온 그는 1905년 돌아갔다. 다음해 여름, 그는 다시 왔다. 풍전등화 격인 대한제국의 실상을 취재하기 위해서다. 약 1년 반 동안 머무른 그는 목숨을 걸고 의병들을 인터뷰했다.

매켄지가 1908년 펴낸‘대한제국의 비극’(Tragedy of Korea)에는 의병사진 2장을 비롯, 27장의 사진이 실렸다. 예외 없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면들이다.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에는‘자유를 위한 대한제국의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이라는 책에서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다. 지난 15일 광복절을 계기로 초청받아 온 매켄지의 손녀는 대한민국 정부에 고마움을 전하며 국가보훈처에 위 두 책을 기증했다.

‘대한제국의 비극’ 집필 때만 해도 매켄지는“칼을 든 일본이 고결한 목표를 선택할 것인가?”라며 일제의 팽창정책은 인접국에 대한 선린정책일 수도 있다는 기대를 희미하게나마 품었다. 그러나 일제가 3·1 운동을 비인륜적이고 극악하게 탄압한다는 소식을 접한 뒤 쓴‘자유를 위한 대한제국의 투쟁’에서는 자신의 희망이 얼마나 공허한 것이었는지를 반성했다. 1920년에는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 1919년 서재필 주도로 설립) 영국 지부를 조직, 우리나라에 우호적인 국제사회의 여론을 이끌어 내는 데 기여했다.

‘대한제국의 비극’은 태극기의 역사에도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한다. 39쪽에‘기생, 코리아의 게이샤’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이 있다. 앳된 기생들 뒤편 천막 위에 태극기와 일장기가 보인다. 매켄지는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실마리는 책의 끝부분인 248~249쪽에서야 풀린다.

“일본의 무역업자들은 대형 사업을 도모하면서 자국과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아낸다. 1907년 여름 서울 중심가에서 대규모 박람회가 개막했다. 대한제국 정부가 공식후원하고 막대한 재정지원을 한 행사다. 일본상인들은 새로운 황제가 개막식에 참석하도록 압력을 가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박람회 광고를 위해 주홍색 핫팬츠와 가장무도회를 연상시키는 의상을 입은 일본 게이샤와 매춘부들이 요란한 음악과 함께 거리를 활보하면서 떠들썩한 쇼를 벌였다. 또 박람회장 안에서는 입장객들의 이목을 끌려고 기생들이 계속해서 여흥 프로그램을 펼쳤다. 전시물은 다양한 일본제품들이 주류를 이뤘다. 한국이나 외제를 찾아봤지만, 일본업자가 수입해 전시한 유명 프랑스 포도주만 눈에 띄었을 뿐 한국상품은 보지 못했다. 대다수가 한국인 관람객인 이 박람회는 결과적으로 한국에서 일본상품 판매를 엄청나게 촉발시키는 행사였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은 “매켄지가 촬영한 태극기와 기생은 일제의 경제적 침략 앞에 힘없이 무너진 대한제국의 단면을 드러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일제의 대한제국 군대해산은 1907년 7월31일에 시작돼 9월3일 형식적으로 종료됐지만 실질적인 해산은 아니었다. 극소수 매국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민과 대한제국 장병은 주권을 되찾으려고 절치부심했기 때문이다. 의병은 바로 이런 염원을 대변하는 실질적인 우리 민족의 군대였다. ‘대한제국의 비극’은 그들에 관한 더없이 귀중한 정보와 사진을 담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해산된 군대와 산악의 사냥꾼들로 이뤄진 의병이 턱없이 부족한 무기로 일본군과 접전, 승리를 거둔다는 소문은 매켄지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본군대와 전투를 벌인다는 의병을 찾아 나섰다. 이천, 충주, 제천은 일본군에 의해 폐허가 된 채 일장기와 일본군의 총검 아래 놓여있었다. 원주를 경유해 양근(현 양평)으로 간 그는 태극기가 아닌 깃발 10여개가 집 위에 게양된 것을 목격했다. 거리 양쪽 점포들의 닫힌 문에도 흰종이에 붉은잉크로 그려진 기가 붙어 있었다. 교회가 일본군의 만행에 대비해 만들어준 적십자기다.

그곳에서 매켄지는 의병들을 만났다. 대한제국 군복, 한복 등 각양각색 초라한 의복에 작동하지 않을 듯한 온갖 구식 총으로 무장한 의병들에게 그는 감동했다. 가망 없는 싸움과 죽음을 목전에 둔 그들의 눈과 얼굴에 충만한 불굴의 의지와 불타는 애국심을 확인했다.

의병은 매켄지에게 돈을 줄테니 무기를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물론 기자의 능력 밖이었다. 일본군에 관한 정보도 줄 수 없었다.
그저 부상당한 의병들을 치료하고, 앞날을 축복하며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매켄지는 주민들에게서 하루 전의 끔찍한 얘기를 들었다.

“무기도 없는 의병 부상자 2명이 총상을 입고 유혈이 낭자한 채 쓰러졌는데, 심한 고통 속에 신음하듯 ‘대한만세’를 되뇌었다. 일본군이 오더니 총검으로 목숨을 끊고도 찌르고 또 찌르더라. 우리는 갈기갈기 찢긴 시체를 가까스로 모아 묻어줬다.”

이현표 원장은“당시‘대한만세’나 ‘태극기’는 바로 악랄한 일본군 앞에서 끔찍한 죽음을 의미했다”고 애도하면서도 자랑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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