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와 장애인, 그리고 가난한 이웃과 나병환자들까지 돌보는 등 평생 봉사의 삶을 살다간 고 ‘루이 델랑드(한국명, 남대영)’ 신부가 칸타타로 부활한다.
포항의 성모자애원을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소외받는 사회적 약자들을 구원하는 사회복지사업을 숨질 때까지 펼쳐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포항을 빛낸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포항의 젊은 예술가들이 루이 델랑드 신부의 삶을 노래하는 공연을 펼칠 예정이어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포항문화재단 중앙아트홀과 벨라미치문화예술연구소는 ‘2021 공연장 상주단체 육성지원 사업’ 공모에 선정돼 국·도비 7,000만원을 확보했다고 최근 밝혔다.
‘공연장 상주단체 육성지원사업’은 도내 공연장 활성화와 예술단체의 창작 활성화, 지역민들의 문화향유 확대 등을 위해 지난 2010년부터 시행해 오고 있다.
포항문화재단 중앙아트홀 상주단체에 선정된 ‘벨라미치문화예술연구소’는 청년 예술가들이 레퍼토리 개발, 시민음악교육, 사회봉사, 예술가 권익 신장을 위해 2014년 창단됐다.
이번 2021 공연장 상주단체 선정 공모에서 벨라미치문화예술연구소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시민과 예술단체 간 새로운 연결방식으로 시민문화 향유를 제공하고 초연창작 공연콘텐츠 제작과 구 도심의 상징적 공간이자 포항 문화의 중심이었던 중앙아트홀의 공간적 가치를 재현하는 우수 레퍼토리 프로그램을 제안해 최고 등급인 7천만 원을 지원받게 됐다는 평가다.
특히 초연창작 공연콘텐츠로 지난 1972년 타계하기까지 포항에 머물며 고아, 의료, 교육, 문화 등 다방면에서 오랜 시간의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다간 '푸른 눈의 한국인, 루이 델랑드' 신부의 이야기를 클래식 음악 양식을 활용한 창작 칸타타로 제작해 선보일 예정이다.
고 배용일(포항문화원장 역임) 포항대학 교수가 포항을 빛낸 인물로서 평가한 자료를 보면, 루이 델랑드(1895~1972) 신부는 1923년 6월 5일 일제강점기의 핍박과 가난, 질병과 무지의 고통을 겪고 있던 한국에 첫 발을 디뎠다.
1924년 부산진 본당에 부임하여 노동자 집의 노동복지와 야간학교의 아동복지 등을 의욕적으로 펼치며 시작한 복지사업은 조선사회사업협회 설립(1928년)보다 앞섰다.
1934년 영천에 부임하여 용평성당에서 무료진료소, 보육원, 양로원 등을 설립하면서 복지사업은 본격화됐다. 1935년 영천 용평리에서 예수성심시녀회를 설립했고 1936년 성모자애원을 설립했다.
1950년 3월 25일 6.25전쟁 직전 자신이 돌보던 130여명의 가족과 함께 영천을 떠나 고향 노르망디를 연상하게 하는 포항 송정리(현 포항제철소) 바닷가에 정착했다.
포항 형산강전투 와중에도 피난가지 않고 믿음으로 성모자애 가족들을 지켜냈다.
루이 델랑드 신부는 황폐한 황무지에 세운 성모자애원을 바탕으로 세상에서 가장 소외받고 극한상황에 처한 사회적 약자들을 구원하는 사회복지사업을 펼쳤다.
당시 송정리에는 800여명이 공동체 생활을 했다. 환자들에 대한 치료는 물론이고 나병환자들까지 돌보고 치료했다.
1965년 12월 모든 직에서 물러나 오천면 갈평리로 거쳐를 옮겨 마을주민들을 위한 복지사업을 계속 했다.
새마을운동 발상지인 포항 기계면 문성리의 지역개발은 정부주도로 이뤄진 것이지만, 루이 델랑드 신부가 갈평리에서 펼친 지역사회 복지사업은 아래로부터 지역주민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냈다.
오늘날 예수성심시녀회와 성모자애원의 영성사업과 자애사업은 지구 반대편 남미에까지 미치고 있다.
루이 델랑드 신부는 1972년 10월 24일 사제 서품 50주년인 금경축을 맞았고 한국사회복지의 요람으로 개척한 포항에서 23년간 정주, 활동하다 그해 11월 17일 새벽 78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묘지는 현재 포항 대잠동에 위치한 예수성심시녀회 모원 뒤뜰에 있다.
한편 정부는 한국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1962년 문화훈장 국민장을 수여했고 1969년에는 신부의 모국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프랑스 최고훈장을 수훈했다.
김재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