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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경북신문

萬波息笛 만파식적 - 오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오피니언

萬波息笛 만파식적 - 오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일간경북신문 기자 gbnews8181@naver.com 입력 2022/05/17 16:36 수정 2022.05.18 08:27

정 여 산<br><자유기고가>
정 여 산
<자유기고가>
혁명가를 꿈꾸던 시기가 있었다. 뜨거운 가슴과 젊은 눈에는 세상을 바꿔야만 할 것 같았다. 나훈아가 소크라테스 형에게 묻고 있는 ‘세상이 왜 이래’는 일찌감치 내가 하고 있던 물음이다. 

교회를 다니며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관점으로 인간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생명을 던져 인류를 구원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은 역사상 최고의 혁명이다. 알 파치노가 악당(따지고 보면 같은 부류인데 더 못생기고 더 나쁜 놈)을 기관총으로 몰사시키는 장면은 대단한 휘산 효과를 일으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독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실존주의 계열 글들은 세상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정면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공격했다. 사르트르의 ‘구토’는 제목에 끌려 집었고 잘못된 현실에 구역질 날 때 마다 펼쳤던 기억이 있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주인공 뫼르소는 자유를 갈망하며 부조리한 세상과 타협을 거부한 채 사형장에서 죽어간다. 그 때까지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혁명가다.

오월은 혁명을 떠올리는 계절이다. 5.16 군사 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을 혁명이란 관점에서 함께 묶을 수 있다. 23일은 전직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져 자신의 혁명을 마무리한 날이다. 관제교육 영향으로 필자에겐 ‘혁명’이 긍정적으로 주입되어 있다. ‘나쁜 것을 물리치고 올바른 것을 바로 세우는 일’이란 배운 사람으로서 마땅한 도리라 인식하게 되었다. 

 

삼팔육(이제 오팔육이 되었지만) 세대중에서는 이렇게 키워진 사람들이 많다. 신군부 쿠데타 집권이 끝나갈 즈음 김영삼, 김대중 두 대통령은 이들을 활용하여 민주화 혁명을 이끌어낸다. 레닌이나 마르크스를 공개적으로 들고 다니기 어려웠을 베이비부머들은 대안으로 남미의 영웅 체 게바라를 채택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하는 외모와 약자편에서 불의에 대항한 그의 삶은 가히 혁명의 아이콘으로 젊은이들 가슴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세계와 나라와 사회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은 7080년대 우리 젊은이들을 어렵지 않게 혁명의 길로 내몰았다. 교사이셨던 아버지는 박정희 지지자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구미국민학교 교사 박정희가 혈서를 써서 만주 군사학교로 지원하게 되는 장면을 자주 거론하곤 하셨다. 10. 26 사건이 발생했을 때 아버지는 매우 충격을 받으셨고 그 영향인지 중학생인 나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라일락 향기를 맡으면 멀미가 난다던 단발머리 선배는 4월과 5월 혁명 정신을 열변했다. 졸업 이후 얼마 안되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슬퍼했다. 신념을 따른 행동이었을 것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 평생 싸우자던 뜨거운 맹세'를 타는 목마름으로 함께 불렀다. 미국이 니카라과 침공했다는데 어깨동무를 하고 해방춤을 추면서 돌과 병을 던졌다. 돌이켜 보면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지만 80년대 젊은이들이 공유한 ‘시대정신’이었다.

1987년 6월 혁명 때 입사원서를 내러 서울 시청 옆 건물에 갔다. 제출기간이 있었을 텐데 왜 하필 6월 10일에 거길 갔을까. 어쩌면 시청 근처까지 가기 위한 명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원서를 내고 나오는 길에 시위대 군중속으로 함께 묻혀져 들었다. 플라자 호텔을 뒤로 하고 광장에 운집한 시민들 사이 어디쯤 나도 있을 것이다. 

 

이듬해 입사를 하고 3년이 지날 즈음 가슴 속에 잠들어 있던 ‘문제의식’이 다시 발동하였다. 기자들을 상대하는 언론대응 업무는 합법성 보다 합목적성으로 자주 마음을 다독여야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자신의 물음에 더 이상 대답을 찾기 어려웠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혼란스러웠다. 사직서와 함께 일주일 휴가를 통보하고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1991년 5월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둘러 서울을 피해 해운대에 도착했다. 모래밭에 앉아 일주일 휴가를 어떻게 보낼지 궁리했다.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는 아직 세상에 나오기 전이라 ‘그리스인 조르바’가 손에 쥐어져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카잔차키스 묘비명을 직접 확인하러 크레타 섬을 방문할 정도로 조르바 팬이 되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오른편을 돌아보니 문득 한반도 서쪽지역이 궁금해져 목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유달산 공원, 전남대, 5.18 묘역(아직 흙 무덤이었다), 전북대를 거쳐 군산, 대천 해수욕장을 거쳐 일주일만에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회사에서 전화가 몇 번이나 왔는데 어딜 갔다 왔느냐고 하숙집 아주머니가 놀라며 반긴다. 사표는 수리되지 않았고 무단결근으로 그 해 상여금만 크게 깎였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뀐 지금도 자기로부터의 혁명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세상은 여전히 바뀐 게 없다. 혁명가를 꿈꾸기엔 이제 나이를 돌아보게 된다. 정치를 본업으로 하고 있는 오팔육 고향 친구들을 응원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정종식, 채영우, 김철수, 방진길, 백강훈, 유성찬. 꼭 당선되어 풀뿌리 정치혁명 과업을 기필코 완수하길.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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