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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경북신문

萬波息笛 만파식적 - 나의 해방여행 일지..
오피니언

萬波息笛 만파식적 - 나의 해방여행 일지

일간경북신문 기자 gbnews8181@naver.com 입력 2022/05/24 15:51 수정 2022.05.24 15:52

정 여 산<br><자유기고가>
정 여 산
<자유기고가>
무한 반복 일상이 따분하고 지칠 때 사람들은 일탈을 시도한다. 늘 하던 것에서 탈피하기, 혼자서 벗어나기를 꿈꾼다. 일탈(逸脫)이든 일탈(一脫)이든 무엇에서 해방된다는 의미다. ‘풀리지 않는 난제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소란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홀로 고요하고 싶을 때, 예기치 못한 마주침과 깨달음이 절실하게 느껴질 때 매순간 우리는 여행을 소망한다’(김영하, 여행의 이유)

루틴이란 편하긴 하지만 지루하고 채도를 떨어뜨린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제목만으로도 시청률 경신 재료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제 아무 말이나 막 하는구나’ ‘전화를 꼭 할 거야. 자주 안 해’ 등. 손석구 김지원의 맛깔스러운 대사는 3040 이목을 붙들어 매기에 충분하다. 금기시되어 온 주인공 캐릭터(남자 접대부)는 구태의연한 시나리오에서 해방된 느낌마저 시청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작가와 제작진들도 달라진 자신들을 발견하는 해방감을 즐기고 있을지 모르겠다. 주제(해방이라는)에 이토록 충실한 드라마는 지금까지 없었던 것 같다. 죽을 뻔한 날도 쌀 안쳐 밥 해야 하던 엄마는 결국 죽어서야 고단한 일상으로부터 해방된다. 허를 찔린 시청자들은 어이가 없다고 난리다.

‘늘 하던 대로, 늘 먹는 대로’는 흑백 화면이다. ‘안 하던 거, 안 먹어보던 거’로 칼라풀 인생을 만들어야 한다. 같은 시각에 버스 타고, 같은 장소에서 늘 만나는 사람 확인하고, 일터에 가까워지면 몇 걸음 앞서가는 동료를 발견하는 나날이다. 틈새 하나 없는 일상은 우리 삶에서 향기와 빛을 빼앗아 간다. 계획을 세워 떠나든 훌쩍 나서든, 혼자나 아니면 여럿이서 누구나 때가 되면 떠나고 싶어 한다. 코와 입을 막고 가리고 갇혀 지낸 시간이 너무 길었다. 화창한 날씨에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인파들 표정에서 반가움이 느껴진다. 나이와 국적을 떠나 견뎌내 살아 남았다는 눈빛을 함께 나눈다.

기억에 남을 여행은 우리 인생을 지탱하는 강렬한 에너지다. 김훈 작가 말 대로 ‘밥벌이’는 지겨운 일이다. 금수저 물고 태어났다고 면제되는 생계가 아니라 입으로 들어가는 ‘밥을 벌어야’ 하는 행위 말이다. 죽지 않은 인간은 보통 하루 세 끼를 먹는다. 먹어야 산다. 아침을 먹든 브런치를 먹든 음식이 입에 들어가기까지 뭔가를 해야 한다. 눈을 뜨든, 옷을 입든, 조깅을 하든, 출근을 하든, 새벽 시장에 나가서 생선 경매를 하든, 밭을 매든, 시멘트 포대를 짊어지든 하다못해 가만히 누워 요양 간호사 처치를 견뎌내든 어떤 ‘밥벌이’를 하게 되어 있다.

김훈 소설을 보면 ‘개’도 뭔가를 해야 벌어서 먹는다. 그런 개도 짬이 나면 다른 동네로 마실을 다닌다. 주인공 ‘보리’는 사람들이 뭣 때문에 저토록 죽기 살기로 일을 하는지, 개도 웃을 일들에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지 이해할 수 없어 한다. 공부를 하고 일을 하고 선거에 이기려고 길 거리에서 아무나 보고 절을 하고 목이 쉬게 연설을 하고, 직장에서 쳐다보기도 싫은 인간들과 말을 섞고 하기 싫은 일(미셀 트루니에가 정의 내린)을 하고. 때로는 위험한 곳에서 목숨을 걸면서 밥 먹고 살아간다.

밥벌이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는 데는 여행이 최고다.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김영하) 일상을 없애야 한다.‘나는 매년 떠난다. 사랑에도 우정에도 창작에도 깃드는 권태기가, 여행에는 아직 없다. 나는 왜 온갖 고생을 사서 하면서도 이토록 멀리, 이토록 자주 길을 떠나는 것일까.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아주 멀리 떠나야만 비로소 깨달아지는 생의 진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힘들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떠나야만 보이는 것들을’(정여울, 내성적인 여행자)

코로나가 끝날 것을 기대하며 사람들은 일찌감치 여름 휴가나 추석 연휴에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10월이나 11월 항공권 예매도 벌써 붐빈다. 여행사, 항공사, 물류기업 주가가 다시 들썩이고 있다. 세계 최강 물류 강국 우리나라는 수십 만 라이더가 어느 곳에 무엇이든 원하는 때에 배달해 준다. 어디서 차 가지고 술 한 잔을 해도 바람처럼 나타난 기사가 애마를 몰아 집까지 옮겨다 준다. 이런 첨단 인물류(人物流) 시스템이 돌아가는 나라는 대한민국 외에 아직 없다. 무인도에 배달통 들고 나타난 라이더가 ‘짜장면 시키신 분’ 외치는 광고 나올 때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올 가을엔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은 젊은 날 훌쩍 경춘가도를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던 날이다. 지나치게 우거지지도 않고 키가 작지도 않은 코스모스를 따라 한참 걷다가 어느 모래둔에 앉아 ‘풍장’이란 시를 읊조렸다.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황동규)

미시시피 강 선상 카지노 여자 딜러, 크레타 어느 해변에서 따라하던 조르바 댄스, 빠삐용이 뛰어내린 절벽의 바람은 잊을 수 없다. 칠포 바다가 엿보이는 욱이네 민박에서 ‘롱 굿바이’를 완독하는 여행을 꿈꾸며 장마와 땡볕과 태풍을 또 견뎌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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