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 그늘에 달이 오면/술 익은 초당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이호우 시인의 시조다. 첫 부분을 ‘친구 있는 마을은’으로 바꿔 읽어 본다.
지자체 선거가 끝나고 친구들이 모임을 가졌다. 시 의원 출마자가 다섯 명이 회원으로 있는 모임이다. 1983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포항 인연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모임이다. 쉰을 막 넘긴 시점에 친선 골프를 계기로 발족한 지 곧 십년을 내다보게 된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으로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있는 스무 명 정도의 멤버들이 가끔 얼굴을 보는 모임이다. 평소에는 막말(거의 욕설에 가까운)과 고성으로 킥킥, 껄껄거리며 거리낌 없이 지내다가도 선거 철이 되면 미묘한 분위기에 머쓱하고 불편해지기도 한다.
모임을 발족한다는 얘기를 듣고 ‘뭣 하러 그런 일에 나서냐’ 라며 괜히 헛심 쓰지 말라고 걱정해 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고맙기도 하고 살짝 열이 받기도 했다. 생각해주는 이유는 충분히 알지만, 그렇다고 서거럭거리고 데면데면한 상태를 그대로 방치하자는 말인지 되묻고 싶었으나 그만 두었다. 괜히 그 친구의 고마운 마음만 훼손될 수도 있는 무가치한 논쟁으로 끝나기 쉽상이다.
오랜 객지 생활 후 고향에 돌아오는 것은 편하기도 불편하기도 하다. 익숙한 언어와 풍습은 객지생활의 긴장을 이완시켜 무장을 해제하게 한다. 약속 장소를 설명하는 친구들에게 여러 번 되물어야 할 정도로 도시가 변모해 있다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왕년에 껌 좀 씹고 바지 춤 올리던 친구들이 주름잡던 ‘우체국 앞’은 한산해지고 이전에는 갈대밭이거나 논밭이었던 지역이 화려하게 번창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도 모르느냐’는 소리를 몇 번 들어야 제 시간에 약속 장소에 나타나 온전히 귀향의 자격을 얻게 된다.
이런 저런 에피소드로 친구들 관계에 묘한 그물망이 형성되어 있다는 게 불편한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신경 쓰이는 모임 발족에 기꺼이 함께 해 준 친구들은 늘그막에 보배 같은 존재들이다. 늘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고 익숙한 음식을 먹고 정해진 패턴대로 노래하고 즐긴다는 것 우리 삶의 질을 높여주는 핵심적인 요소다. ‘거서 보재이’(그 곳에서 보자)라는 말 한 마디면 끝이다. 언제, 어디인지는 그냥 통하는 것이다. 그래 봤자 두어 군데이고, 급한 일로 첫 장소에서 못 보면 두번째 장소로 합류하면 된다. 이런 고향을 두고 사람들이 수도권으로 밀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지방 정치사회와 엘리트’에서 오관석 교수는 우리나라 지방 정치 권력의 현황을 정치, 사회, 시민단체 엘리트들 활동에 초점을 두고 설명하고 있다. 지역사회 권력구조는 심층적이고 다차원적이다. 저자는 지역사회 엘리트의 구성과 특징이 어떻게 지역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지역사회 엘리트가 공식적, 비공식적 권력을 행사하면서 지방 정치를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이 지역사회 경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역은 많다. 울산의 현대, 구미의 삼성, 청주의 LG, 거제도의 삼성중공업 등이다. 지역 사회와 기업의 상생은 해외에서도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미국 시애틀 마이크로소프트, 일본 키미츠의 일본제철, 도요타시와 도요타 자동차, 상해, 북경, 천진의 자동차 회사 등 너무 많다. 포항과 광양은 철강기업과 오랜 인연을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지역기업 경영층이 되면 지역사회 엘리트와 이어지게 되고 지역 유지들은 이런 관계를 교묘히 활용하여 자신들 영향력을 오래도록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포항도 이런저런 단체의 뿌리 깊은 이권 개입에 대해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다. 지역사회 유권자들도 점점 의식 수준이 높아져서 후보를 검증하는 기준이 날카로워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인물들은 교체될 것이다.
앞서 말한 모임에 이번 선거에 당선된 시의원이 세 명이 있고 낙선한 친구가 두 명 있다. 당선된 친구 축하하고 떨어진 친구들 격려하기 위한 자리라 서로 조심 신경을 쓰는 눈치가 역력하다. 당선사례 행사 등으로 불참하고, 낙선으로 곧 백수 친구들은 참석하여 ‘힘내라’ ‘걱정 마라’ ‘파이팅’으로 잔을 부딪친다. 다음 선거에는 시, 도 의장 등 무게 있는 역할을 맡으라는 덕담이 나올 때 취기들이 무르익어 간다.
부모님 돌아가시고난 고향은 친구들이 지키게 된다. ‘뉘 집을 들어서면 반겨 아니 맞으리’를 읊으며 전원주택에 갑자기 들이닥쳐도 아끼던 콜롬비아산 원두 커피를 바크하우스 ‘월광’과 함께 내어 놓는다. 황토를 얼마나 사용했고, 멋진 모과나무를 어디서 구했고, 바닥 타일을 어렵사리 구해 깔았다는 얘기에 아낌없는 리액션을 한다. 그래야 난데없는 불시 가택 침입에 대한 최소한의 면책이 될 수 있으므로. 잔디가 무성하게 자랄 즈음 잔디 깎는 기계라도 한 대 끌고 가야할 듯하다.
함께 늙어갈 친구 있는 마을이 어디는 고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