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크루즈는 생각보다 늙지 않았다. 탑건의 매버릭은 꼭 그여야만 할 것 같다. 1986년에 나온 전편은 주제가 신드롬을 비롯해서 오토바이 질주, 전투기 공중전, 항공모함 이, 착륙 장면 등 영화팬들을 사로잡았다. 당시 영화를 많이 봤다고 자부하는데,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기억이 없다. 아마도 신림동 고시원에서 하루 18시간 막장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던 모양이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구씨’ 돌풍으로 1200만을 넘긴 범죄도시2, 전편을 능가한다는 마녀2와 함께 극장가를 달구고 있는 개봉작을 가족들과 관람했다.
주말 영화관은 코로나 이후 보복관람 심리 덕분인지 커다란 팝콘 용기를 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마스크만은 착실히 하자는 눈치를 서로 주고받는다. 젊은 배우들 사이에서도 전혀 꿀리지 않는 톰 아저씨는 은퇴를 눈 앞에 둔 동년배 관객들에게 용기와 위안을 준다. 아직 안 본들에게는 조심스럽지만 몇 가지 관람 포인트를 정리해 본다.
첫째, 자기만의 세계관을 고집스럽게 지키는 것이다. 동기들은 승진을 해서 해군 제독의 위치에 올랐는데 여전히 대령 계급장을 달고 있다. 남들이 승진을 위해 안달복달할 때 자신만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고 있다. 전투기 성능 테스트 파일럿이 자신의 소명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 일조차도 위에서 지시하는 대로가 아니라 스스로 정해 둔 방식과 목표를 지켜 나가는 중이다.
군대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장포대’라고 부른다던가. 장군을 포기한 대령, 즉 승진을 포기하면 조직에서 겁날 게 없다는 말이다. 비굴하게 아부할 필요 없이 제 할 일 하면서 정년퇴직 기다리면 된다. 기업 조직에 적용하자면 ‘임포부’ 임원을 포기한 부장이라 할까. 하지만 매버릭 탑건은 포기가 아니라 거부한 것이라 차원이 다르다. 스스로 세운 신념을 따르는 것이다. 직장에서 제 때 승진하지 못하면 리더십 발휘 기회를 얻지 못하고 후배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당하게 된다. 기본이 덜 된 신참들 중에 고참들을 천대하고 심지어 테러를 가하는 사례도 있다. 부장이나 임원을 달고 있는 후배들이 나이 많은 선배 팀장에게 조직을 잘 이끌지 못한다고 질책하는 상황은 최악이다. 아무리 좋은 충고라 하더라도 적절한 지위와 권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개소리’로 치부된다. 레전드급 역량도 이에 걸맞은 지위가 수반되어야 한낱 꼰대의 넋두리라는 오명을 씻을 수 있게 된다.
둘째,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이다. 2분 30초에 목표물을 명중시켜야 하고, 지대공 미사일을 피해 저공비행을 해야 하는 고난도 훈련과정을 아무도 통과하지 못하자 매버릭 교관이 직접 문제를 해결한다.
한 때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가 긴 내리막길을 걷고 있으면서도 자신만의 영역을 꾸준히 지키고 있다. 인사부서에서 30년을 근무한 직원에게 환율이나 중장기 재무전략을 수립하라는 것은 어려운 요구다. 후배들 앞에서 망신당할 게 뻔하다. 자신의 영역에서도 요즘처럼 새로운 기술과 정보가 빠르게 나타나는 세상에서 나이든 선배가 뭔가를 보여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영화 같은 얘기다.
다만 마음가짐 같은 것은 후배들 눈에 비칠지도 모르겠다. 자기가 먼저 뒷방을 찾아서 기어들어가거나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지레 못한다고 숨는 선배들을 존경할 후배들은 피라미드 건설 이후 찾아보기 어렵다. 내부 벽에 ‘요즘 젊은 것들 버릇없다’고 씌어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셋째, 녹슬지 않은 숙련도를 유지하는 일이다. 누구나 잘 할 수 있는 게 있다. 그 일을 오래 열심히 하면 남들보다 잘 하게 된다. 국민교육헌장에도 있듯이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여’ 일만 시간을 들이면 성과를 낼 수 있다. 일반 사람들이 관운이 있다는 건 본인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인간을 직렬형과 병렬형으로 나눌 수 있을지 모르겠다. 책을 읽더라도 여러 권을 동시에 읽고, 영화(물론 집에서 볼 때)를 보다가도 잠시 끊고 딴 짓을 하게 되는 병렬형이 있다. 직렬형은 한 가지 일을 시작하면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를 해야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집중하고 몰입하는 스타일이다. 각자에게 맞는 일터가 있는 것이다.
은퇴를 앞 둔 고참들은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조직생활을 마무리하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래야 스스로 삶에 민망하지 않고, 최소한 유종의 미를 실현할 수 있다. 짓밟힌 자존감도 회복할 기회를 얻게 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톰 크루즈는 탑건 홍보차 한국에 와서도 팬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이 배우의 미소에 많은 팬들이 매료된 모양이다. 탑건에서도 여러 번 나오는 ‘그런 표정 짓지마’라는 대사에서 영화 대부 돈 코를리오네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처럼 매버릭이 짓는 표정에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있나 보다.
86년의 탑건 매버릭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 늙은 톰 크루즈 연기를 과연 언제까지 볼 수 있을까 하는 표정으로 영화관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