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고 열흘이 넘었다. 책상 위 일자 달력은 아직 1월 2일에서 멈춰있다. 가벼운 종이 몇 장 넘길 여유가 없었나 보다. 가까스로 마무리된 일의 끝에는 몸살이 남았다. 휴일 오전을 늘어져서 보냈다. 낮이 되어서야 지친 몸과 마음에 환기의 필요성을 느낀다. 텀블러에 커피를 담는다.
날씨 앱에 나타난 기온은 12℃다. 바다를 향해 앉았다. 등 뒤로 볕이 닿으니 금세 노곤해진다. 해초가 파랗게 올라붙은 해변을 보며 성급하게도 봄날을 떠올린다. 둑에 앉아 텀블러 뚜껑을 열었다. 새해부터 후려치는 일들에 혼미해진 머릿속을 정리하기에 좋은 날이다. 멀리서 엄마 손을 잡고 아이가 아장걸음을 걷는다. 분홍색 패딩이 뒤뚱대며 점점 다가온다. 아이의 행로를 이어줘야 할 것 같아 자리를 비켜 일어섰다. 햇볕에 눈을 찡긋하며 나를 보는 아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이도 한 손을 들어 답을 한다. 엄마의 시선은 온통 아이에게 쏠려 바다는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오래도록 서로의 손을 놓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아이가 시야에서 멀어지고, 누군가 매어놓은 리본이 그 자리에 들어온다.
색 바랜 노랑과 빨강의 리본이다. 해파랑길 코스의 표식 리본으로 달아놓은 모양이다. 낯선 곳으로 들어선 사람들의 길잡이 역할인 셈이다. 헤매지 않게, 두렵지 않게, 길을 잃지 않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게, 가는 동안 해안의 풍경을 제대로 누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어느 가수는 덤덤하게 노래한다. 삶은 여행이라고. 아직도 내 삶의 여행은 덤덤하게 보다는 막막하다 여겨진다. 방향을 찾지 못한 채 무턱대고 걷고만 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에게는 길잡이가 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마음만으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음을 실감한다. 어쩌면 허풍선이 엄마가 될 수도 있겠다….
앞서 걸으며 리본을 매단 사람의 마음은 확신으로 차 있었을까. 누군가는 그저 스쳐 갈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걸어가는 방향이 될 것이다. 무엇이 되었건 분명한 하나의 의미는 담았으리라. 리본이 옅은 바람에 춤추듯 날린다. 내 안의 리본을 꺼내 단단히 묶어두는 일월의 어느 날이다.
소정 (嘯淨) ▶글 쓰는 사람들의 모임 ‘에세이 문’ 회원 ▶ ‘포항여성사진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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