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택길/시인
가끔 마누라가 말하길 책만 보고 있으면 밥이 나온답니까? 글을 쓰고 그림 그리면 돈이 나온답니까? 하며 농담으로 웃으며 말을 하지만 그 말속엔 어느 정도 그녀의 불만이 섞여 있다.
사실 그렇지. 보고 쓰고 그리다 보면 들어오는 것은 없는데 나가는 것은 무척 많다. 머릿속에 복잡한 잡념들이 나가버린다. 마음속에 뭉쳐 답답했던 기운이 흐물흐물 녹아 사그라진다.
눈앞에 아른거리던 시간의 유령들도 멀어지고 만다. 내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그리고 처절하게(?) 밀려난 그들의 자리엔 원색으로 잘 꾸며진 비워진 바구니만 몇 개 놓여 있을 뿐 정말 얻은 건 하나도 없다.
스쳐가는 여름밤의 바깥 공기가 시원하니 오랜만에 바닷가 실내포장 집에서 소주나 한잔하자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보던 책을 덮고 집을 나섰다.
바닷바람 타고 다니는 퀴퀴한 짠 내음, 하지만 맡을수록 삶의 정이 스며드는 내음, 파도에 울렁이는 빈 뱃머리에 잠을 자던 갈매기의 잠꼬대가 가끔 들려오기도 한다. 아무렇게나 감아 여기저기 뭉쳐놓은 그물 더미를 보며 또 한편의 꾸밈없는 세상을 느낀다.
오래된 실내포장 집엔 술 취한 어부들의 허스키한 큰 목소리도 들린다.
항구의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서로 낯설음이 없다. 비록 앞, 뒤, 옆 테이블은 다를지라도 오랜만에 육지를 찾은 그들의 마음에 잠시 잃어버린 정과 자유로 테이블이 모아지기도 한다. 그들과 섞사귀기위해 자리를 같이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부들에게서만 풍기는 철학을 들을 수 있고 어부들만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만의 삶을 듣다보면 그 순간만은 나도 어느새 어부가 되버린다.
아니 되어야 한다.
얼마나 배운 것이 많이 배운 것인지 또 얼마만큼 가진 것이 많이 가진 것인지 지식도 부와 명예도 그들과 마주 앉은 자리에서는 모두 다 비워진 잔에 따라지는 소주 만큼 공평해진다.
원색으로 꾸며놓은 내 빈바구니, 이제 나는 저들의 노래, 저들의 이야기, 그리고 저들의 마음을 얻어, 바구니 한편에 담아 절묘한 조화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들은 굳은살이 베어 거칠어진 손을 내밀어 안녕의 악수를 청하고 떠났다. 뒷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제법 취한 듯 콧노래 흥얼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이곳저곳 너누룩해진 자리를 보며 비워진 안주 그릇에 더금더금 회를 썰어 얹어주는 주인 아줌마의 웃음에서 느끼는 사는 맛, 그리고 잠시나마 지배할 수 있었던 내 시간에 통쾌한 삶의 여유를 느낀다.
"봐라. 친구야! 책에서만 인생을 느끼고 글로서만 인생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친구는 마지막 술잔을 채워주며 나를 부끄럽게 한다.
비록, 마음에 잡념들을 책을 읽고 글을 써서 잊는다 하더라도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는 또 고민해야 하는 것이 우리 삶이다. 비워만 놓으려면 영혼이 되어 아주 다른 길을 가면 되겠지만 다 같이 가야 할 길이라면 울고 웃는 방법도 시간도 알아야 하겠지. 채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채워지고, 버리고 싶다고 마음대로 버릴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세상살이 빈잔에 술을 붓는 것처럼 마실 수 있을 만큼 붓고 혹시 다 못 마신다 하더라도 마실 수 있을 만큼 마시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
술 취한 친구의 노랫소리가 커져간다. 박자를 맞춰주기 위해서 나도 노래를 불러줘야겠다.
사는게 무엇인지......알 수 없는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