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출한 소리꾼 이자람(37)은 공연 때마다 나무를 키운다. 그녀가 공연을 시작하면서 입을 떼는 순간, 텅 빈 무대에는 씨앗이 뿌려진다.
공연의 막바지에는 어느새 한 그루의 큰 나무가 관객들 눈앞에 들어차 있다. 탄탄한 기둥 줄거리에 이야기들의 나뭇가지가 한껏 뻗어나 있다. 이자람이 감사인사를 할 때 객석에 풍성함과 먹먹함이 밀려들어오는 이유다.
2014년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실험작으로 선보인 이후 지난해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초연한 '판소리 단편선2-이방인의 노래'가 대표적이다.
이자람이 작·작창을 맡고 지난해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을 수상한 젊은연출가 박지혜(양손프로젝트)가 연출을 맡았다. 소리꾼과 고수 중심으로 결성된 이자람 사단인 '판소리만들기-자'의 작품이다.
마르케스의 잘 알려지지 않은 단편 '본 보이지, 미스터 프레지던트(Bon Voyage, Mr.President!)'가 바탕이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허드렛일로 근근이 살아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인 '라사라'와 '오메로' 부부 앞서 고국의 전직 대통령이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라사라와 오메로는 많은 혼란과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숱한 오해 끝에 '사람'으로서의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이자람은 안내자 역과 함께 홀로 이 캐릭터들을 연기하며 박 연출 말처럼 "판소리는 마법 같은 장르"임을 깨닫게 한다.
다시 마법의 순간을 만끽할 기회가 찾아온다. 21일부터 5월1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해외 킥오프의 의미를 담은 재공연을 선보인다.
최근 경복궁 인근에서 만난 이자람은 "'이방인의 노래'가 2년 전 태어나 오키나와와 밀양에서도 관객들을 만났다"며 "그 동안 쌓은 삶의 경험치가 어쩔 수 없이 묻어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가지와 잎이 한층 풍성해진 나무가 기대되는 이유다. 동시에 관객들은 캐릭터가 정리된 느낌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인물이 처한 상황에 납득할수록 그 캐릭터가 예민해지고 섬세해지더라. 좀 더 촘촘해진 인물을 선보이려 한다"고 했다.
동시에 관객을 상상의 나래로 이끈다. 판소리 세계의 큐레이터이기도 한 이자람의 "생각해 볼까요"라는 권유에 관객들은 인물에 자신의 입장을 투영해 바라보거나 전지적 작가 시점 또는 조감도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미경의 세밀함과 풍경화의 거대함이 함께 있는 것"이 이자람 판소리의 매력이다.
'이방인의 노래'는 기존 이자람이 선보인 작품에 비해 담백하다. 대표작인 '사천가' '억척가'에서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자랑했다. 그녀의 변화에 '이방인의 노래'를 보는 순간부터, 다음 작품에 대한 궁금증이 순식간에 번졌다.
이자람의 무대 위 마법이 허황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이처럼 현실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일을 하기 전 스태프들과 자신의 일들을 나누는 것이 워밍업이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데 너무 걱정이 된다' 아니면 '기뻤다' 등의 이야기를 나누다 연습에 들어간다. 그 시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이자람과 스태프들이 바로 지금 겪고 있는 일에 비하면 허구의 일이다. "일을 하려고 모였지만 다들 저마다 가치가 있는 삶의 살아 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걸 잊어먹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드는 때다. 옆에 있는 사람을 살피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공연예술계에 안 그래도 중요한 단체인 '판소리만들기-자'가 더 귀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8명이 모여 있는데 성공을 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멈추지 않기 위해서 함께 있다. 한국에서 공연을 만드는 것이 사실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창작의 터이기는 하지만 삶의 터가 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터전의 가치를 아는 동료들이 함께 있어서 늘 고맙다는 이자람은 "나 역시 그 마음을 잘 지키고 싶다"고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