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기자 = 근현대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극작가 겸 소설가 김영수(1911~1977)의 대표작인 '혈맥'이 국립극단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다섯 번째 작품으로 선보인다.
김영수는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며 문학과 연극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33년 이해랑, 김동원 등과 함께 '동경학생예술좌'를 창립했다. 첫 작품 '광풍'과 '동맥'을 1934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일본 유학 당시 러시아와 아일랜드 등 유럽 연극의 영향을 받아, 시대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을 썼다.
'혈맥' 역시 객관적인 관점에서 세 가족에게 벌어지는 사건을 관찰한다. 리얼리즘극의 백미로 손꼽힌다. 1947년 광복 직후 성북동 방공호 주민들의 삶을 다룬다. 심각한 빈궁에 시달렸던 역사를 있는 그대로 그린다.
방공호 구덩이를 집 삼아 살아가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 자식이 영어를 익혀 미군부대에 취직해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모습 등이 눈에 밟힌다.
서울 변두리 서민층의 복합적인 심리와 일그러진 삶의 내면, 여러 가치관들이 혼재한 과도기의 사회상을 보여준 수작으로 통한다.
김영수가 창단한 극단 신청년의 박진 연출로 1948년 초연했다. 당시 제1회 전국연극경연대회에서 최우수작품상, 희곡상, 연출상 등 5관왕을 차지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1963년에는 김수용 감독이 영화로 옮겨 제3회 대종상과 제1회 청룡영화상을 휩쓸기도 했다. 연극계 거목 임영웅 극단 산울림 예술감독이 1998년 연출하기도 했다.
이번 무대는 연극 '황금용' '리어왕' 등 군더더기 없이 텍스트에 충실한 연출로 각광받아온 윤광진 교수(용인대 연극학과)가 지휘한다.
윤 연출은 "우리가 잊어버린, 사라진 과거의 기억과 마주하는 작품으로, 과거를 살아온 모든 이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윤 연출의 '리어왕'에서 광기 어린 연기를 선보인 장두이가 무뚝뚝하면서도 속정 깊은 깡통 영감을 담당한다. '시련'의 댄포스 부지사를 맡았던 이호성은 털보 영감, '그림자 아이' '세자매'에서 호연한 황연희는 미스터리함을 지닌 청진계집과 내레이터 역을 동시에 맡는다.
이밖에 땜쟁이, 담배행상, 고등룸펜(고등실업자), 구루마꾼 등 당시 다양한 직업군들은 작품 속에서 생동감 있게 살아나고, 사실적인 소품을 배치한다. '문제적 인간 연산' '리어왕'의 이태섭 무대디자이너가 최고 3.5m높이의 경사로를 이용해 방공호를 표현주의적으로 그린다. 음악디자인의 미스미 신이치는 배우들과 인터뷰를 통해 저마다의 감정선을 부각시킨다.
5월1일 공연 뒤에는 배우, 스태프들이 출연하는 예술가와의 대화가 마련된다. 20일부터 5월15일까지 명동예술극장. 러닝타임 150분 예정(휴식 15분 포함). 2~5만원. 국립극단.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