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장인 안공(安公·안종약)이 임천(林川·부여) 군수가 됐을 때, 보광사에 대선사 아무개란 중이 있어 자주 와 뵈었다. 그 사람됨이 더불어 이야기할 만하므로 서로 친숙했다. 그 중은 시골 여자를 데려다 아내로 삼고 몰래 왕래했다. 어느 날 그 중이 죽어서 뱀으로 변해 아내의 방에 들어와서, 낮에는 항아리 속에 들어 있고 밤이면 아내의 품에 들어가 그녀의 허리를 감고 머리는 가슴에 기대었는데, 꼬리 사이에 음경과 같은 혹이 있어서 그 곡진하고 정다움이 마치 전날과 같았다. 나의 장인이 이 얘기를 듣고 그 여인에게 뱀이 든 항아리를 가져 오게 해 중의 이름을 부르니 뱀이 머리를 내밀었다. 장인이 꾸짖기를, ‘아내를 그리워해 뱀이 됐으니 중의 도(道)가 과연 이와 같으냐’하니, 뱀이 머리를 움츠리고 들어갔다. 나의 장인은 몰래 사람을 시켜 조그만 함을 만들게 하고 그 아내에게 뱀을 꾀어 말하게 하기를, ‘군수님이 그대에게 새 함을 줘 몸을 편안하게 해 줄 것이니 빨리 나와요’하며, 치마를 함 속에 펴주니 뱀이 항아리에서 나와 함 속에 옮겨 누우므로, 건강한 아전 두어 명이 뚜껑을 덮고 못을 박으니, 뱀이 날뛰고 뒹굴며 나오려 했으나 나오지 못했다. 또 명정(銘旌)에 중의 이름을 써서 앞을 인도하고, 중의 무리 수십 명이 북과 바리때를 울리고 불경을 외며 따라가서 강물에 띄워 보냈는데, 그 후 그 아내는 아무 탈이 없었다.”
“정도전은 도은(陶隱) 이숭인과 함께 목은(牧隱) 이색에게 배워 재주와 명망이 서로 비슷했으나 향방이 달라서 정도전이 항상 불평을 품었다. 태조가 등극하자 정도전이 권력을 쥔 신하가 돼 자기의 사인(私人) 황거정을 도은이 귀양가 있는 고을의 원으로 보내서 도은을 매질해 죽이게 했으니, 소인의 마음씀이 심하기도 하도다. 그 뒤 얼마 안 돼 정도전은 이방석의 난리에 관여해서 자기의 몸은 두 동강이 났고, 황거정도 정도전의 문객이라 해서 태종대왕의 미움을 받아 특별히 훈적(勳籍)이 삭제돼 지금까지도 서용되지 못하고 있다. 그 자손들이 임금께 말해서 원통함을 하소연했으나 선비들의 의론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서 회복되지 못했다. 정도전이 받은 화는 이숭인보다 더 심했고, 이숭인의 이름은 후세까지 빛나니 천도(天道)가 어긋남이 없다. 이로써 후세의 소인들에게 경계할 것이로다.”
이런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책이 ‘대동야승(大東野乘)’이다. 조선 초부터 인조 때까지 약 250년 동안 쓰인 야사, 야담, 생활, 풍속 등에 관한 총서다. 매우 복잡한 양상을 지닌 자료와 작품들이 담겨 있어 당시의 역사나 사회 인물, 풍속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성종 때 인물인 성현의 ‘용재총화’에서부터 인조 때 김시양의 ‘부계기문’에 이르기까지 모두 59종의 책이 실려 있다.
조선초 관료들의 호사, 호랑이 쫓은 강감찬, 이숙번의 거만함, 매와 개를 좋아한 안원, 혼자서 왜구를 물리친 이옥, 배후문과 이석정의 활솜씨, 책을 찢어서 외운 김수온의 독서법과 뛰어난 문장력, 어우동의 방탕함, 무욕의 아웃사이더 장원심, 악행을 일삼고도 성공한 어세겸, 혜성이 나타난 변고에 대한 세종의 예언, 당나라에서 돌아온 최치원의 행적에 대한 의문, 정몽주의 세 가지 허물, 사형에 처해질 남편을 구한 부인의 계략, 마흔살이 넘도록 여자로 살아온 사내, 제주에서 서울까지 반년이나 표류한 최부, 중국 사신이 탄복한 허종의 외모와 학식, 애꾸눈을 고치는 방법, 소를 타고 다니는 발가락 없는 기생, 마의(馬醫) 윤중년의 안질 치료 원리, 남의 작품을 표절한 허난설헌…, 온갖 옛날얘기들의 보고다.
대동야승에 실린 작품은 후에 야담 성격으로 전환되거나 소설의 모티프 노릇을 한 듯하다. 야사류의 자료부터 설화적 구조를 지닌 작품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풍속이나 역사 이면에 존재하는 역사의 진실, 서사문학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작품들이 집대성돼 있음에도 이를 깊이 있게 통찰해 내는 논의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이 대동야승의 자료적 가치를 문화콘텐츠 원천자료 차원에서 검토, 새로운 콘텐츠로 재가공 가능토록 한 이유다. “현대사회에서 문화의 소통과 향유 방식은 다양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방법은 디지털콘텐츠화나 문화콘텐츠산업 매체를 통해서다. 문화콘텐츠산업 매체로는 소설, 영화, 연극, 뮤지컬, 만화, 애니메이션, 플래시 애니메이션, 광고, 게임 등을 들 수 있다. 이때 문화는 문화 자체로서의 의미보다 문화 원형을 토대로 재창작 또는 재가공 된 제2의 창작물로서의 의미를 지니면서 대중과 소통되고 현대적으로 계승된다.”
대동야승 속 스토리들은 당대의 풍속이나 역사, 인물, 시정의 모습, 사회상 등을 담고 있다. 문화콘텐츠 시나리오 소재를 개발하는데 적합한 문화 원형이다. 한국적 문화콘텐츠 창작 소재로 활용 가능하다.
디지털 미디어가 소통의 중심이 된 현대사회에서 콘텐츠가 부실하면 오락이나 게임, 대중을 하향평준화하는 콘텐츠들로 디지털 미디어는 넘쳐나게 된다. 고전 인문학 자료를 문화콘텐츠의 원천자료로 활용하는 것은 이들 자료를 사장시키지 않고 계승한다는 점과 문화콘텐츠의 질적 향상을 이룩한다는 면에서 의미있다.
팩트에 픽션을 보탠 팩션이 국제적 추세다. 소설과 영화 공히 팩트에 픽션을 가미한 팩션으로 변하고 있다. 팩션의 바탕인 역사연구 조류도 미시로 흐른다. 이것들로 쓴 책, 즉 눈에 확 들어오는 콘텐츠는 발표 즉시 영상물로 둔갑하는 오늘이다.
한국고전번역원과 강원대학교 연구진(김풍기·함복희·김복순·이은희)이 옛 전화번호부 두께의 ‘국역 대동야승’을 2권으로 펴냈다. 고전번역원 홈페이지→간행물 소개→연구보고서에서 PDF 파일로도 읽을 수 있다. 1164쪽 분량이다. 한문커녕 한자도 몰라도 그만이다. 상상력만 풍부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