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일간경북신문

볼펜·연필로 신문 지우기 40년..
사회

볼펜·연필로 신문 지우기 40년

운영자 기자 입력 2015/03/05 20:49 수정 2015.03.05 20:49
‘대구현대미술제’창립멤버 최병소 개인전




미술 전시장 벽면에 시커먼 종이 쪼가리들이 붙어있다. 가까이서 보니 학창시절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깜지’를 연상케 한다. 작업 방식은 간단하다. 신문지 위에 볼펜과 연필로 새까맣게 칠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이게 그림이다.
신문지와 볼펜, 연필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이 그림, 최병소(72)가 그렸다. 그는 신문지를 볼펜과 연필로 지우는 반복적인 이 행위를 1975년부터 무려 40여 년이나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6·25를 겪으며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1974년 서라벌예대(현 중앙대) 미대를 졸업하고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던 대구로 내려가 고(故) 박현기, 김기동, 이강소 등과 어울리며 국내 최초 현대미술제인 ‘대구현대미술제’의 창립멤버로 활동했다. 1975년에는 대구의 위도와 경도를 의미하는 ‘35/128’이라는 전위미술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신문을 지우는 작업은 이때 시작했다. 세상을 떠난 자신의 할머니와 닮은 할머니가 노점상에서 파는 ‘천수다라니경(千手陀羅尼經)’이 담겨있는 낡은 LP판을 사면서부터다. 그는 방바닥에 엎드려 천수다라니경을 들으며 볼펜과 연필로 무심히 신문을 지우기 시작했다. 군부 독재 시절, 그의 신문 지우기는 일종의 저항의 상징이기도 했다. 포탄이 떨어지고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던 6·25의 아픔도 담겨있다. 30대 초반 그에게 시간과 노동이 집약된 신문지를 지우는 일은 금방 지루해졌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신문 작업을 잠시 중단했다. “그냥 하기 싫었다”며 껄껄거렸다. 그러다 1990년대 다시 볼펜과 연필을 들었다. 대구의 한 화랑에서 전시를 의뢰하면서 신문지 지우기 작업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 면만 지웠던 것을 양면으로 확장했다. 신문지 위에 선을 긋고 다시 연필로 지우는 반복적인 행위다.
매일 반복되는 작업이 지루할 법도 하지만 “지루함을 몸으로 견뎌내는 것이 나의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예전에는 지루했던 작업이 90년대 들어서면서 나의 적성에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현재는 1500㎝에 달하는 큰 작품을 지워도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다고 밝혔다.
그에게 신문지 작업은 지우는 행위인 동시에 해체다. 그 결과물은 전혀 새로운 물성을 가진 물질로 나타난다. 작업은 생각을 비우고 몸으로 한다. “눈이나 머리, 가슴보다 몸으로 그리는 것이 적성에 맞는다”는 그다. “신문을 지우는 일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
그가 5일부터 4월26일까지 서울 종로구 북촌로 5길 아라리오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다. 1973년 독서신문에 한 작업, 150㎝와 700㎝에 달하는 대형설치 작업 등 20여 점을 소개한다. 1978년 대구에서 고 박현기와 김영진, 이강소 등과 함께 사진가 권중인 소유의 K스튜디오에 모여 촬영한 비디오 영상 ‘드로잉’도 있다. 02-541-5701
저작권자 © 일간경북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