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시 양학동의 ‘양학프라자(목욕탕) 헬스장’에는 60-70대를 주축으로 한 ‘보리밥조’가 있다. 건강을 위해 헬스 후 아침마다 죽도시장으로 이동 된장을 곁 드린 조찬보리밥을 먹는 것이 그들에게는 하루 일과의 시작이다. 목욕 동아리형태로 조직원간에 정을 나누고 향수를 만끽하며 살아가는 정보를 나누는 보리밥 애호가들의 오랜 단체로 명성이 나 있다. 단적으로 말해 그들은 보리밥예찬가들이다. 꽁보리밥고개의 역사를 따져보면, 그 보릿고개는 뭐래도 우리 겨레한테는 말 그대로 단장의 눈물고개였다. 배가 고파 창자가 끊어 질 정도로 힘 들든 그 고개를 1960년대 말 무렵 겨우 넘어섰던 한민족의 아픈역사다. 그것도 민주화세력이 욕을 하던 군사독재 덕분이었다. 보릿고개는 반만년만이란 참으로 오랜 세월을 견뎌왔다. 요즘 젊은이들은 바로 그 아버지, 어머니가 삼사십년 전 넘었던 그 보릿고개를 엉뚱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젊은이들은 옛날 청춘남녀들이 그 고개에 있는 보리밭 속에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하던 곳쯤으로 매우 낭만서럽게 생각하고 있다. 어린이들은 또 그 나름으로 동화의 백설공주가 흰 뭉게구름을 타고 둥실둥실 넘었던 높은 마루턱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우리들한테는 예로부터 슬픈 사연이 맺힌 고개들이 너무나 많았다. 손가락을 꼽아보면 울고 넘던 박달재도 그렇고 한 많은 미아리 고개나, 임이 넘던 아리랑고개도 그렇다. 모두가 임을 떠나보냈던 고개들이었으니 한스럽고, 원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을 게다. 옛말에도 무슨 서러움, 서러움해도 배고픈 서러움만한 게 이 지구상에는 없다고 했다. 오늘날 바로 50대 사람들이 그런 고개를 넘고도 살아남은 모진 사람들이다. 60년대 한가운데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서울에서 학교에 다닐 때의 기억이 배가 너무 고팠다는 것이다. 이 참혹한 사실을 시골에 계신 어머니한테는 초특급 비밀로 부쳤다. 그러잖아도 아침일찍 사립문 옆 감나무위에서 까마귀가 울어도 아들한테 좋지 않는 일이 있을까 가슴이 철썩 내려앉던 그 어머니한테 외아들이 객지에서 굶고 있다니, 말이 되겠는가. 모두들 배가 고팠던 그 무렵에도 배부른 사람들도 더러는 있었다. “이 쌍놈의 세상, 확 뒤집어져라”고 주린 배를 부여안고는 갖은 악담과 저주를 퍼부었다. 공자(孔子)는 “세상이 가난해서 불행이 아니라 고르지 않는 것이 큰일”이라고 걱정했다. 그때에는“있는 사람, 없는 사람 가릴 것 없이 쪽박을 하나씩 허리에 차더라도 고루고루 살아보자”는 게 평등주의. 사회주의 사상이였다. 당시 군대에서도 먹을거리는 충족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굶지 않기 위해 용약출진(勇躍出陣), 입대하던 사람들도 많았다. 듣던 그대로였다. 모두가 배가 고팠으나 불평 한마디 하질 안았다. 역시 공자는 성인이라 말씀마다 옳았다. 60년대 그 무렵만 굶었던 게 아니었다. 역사교과서엔 우리 백의민족은 예로부터 예의 바르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만 적어 놓았지, 자자손손(子子孫孫)그 오랫동안 보릿고개를 가까스로 넘겨 살아남았다는 말은 한 줄도 없다. 그렇다면 보릿고개는 어떤 고개였던가? 30~40년전만 해도 시골 사람들은 부농 몇 집을 빼고는 한마을 모두가 봄철이면 굶주렸다. 가을에 거둬 들인 곡식을 한겨울 파먹고 나면 음력 2월쯤엔 달랑달랑해진다. 기다릴 데라곤 이제 보리걷이 밖에 없다. 그 기다림이 길면 넉달, 짧으면 석달, 형편 따라 달랐다. 이때부터가 보릿고개의 시작이다. “보리밥먹고는 뛰지 말아라!” 옛 어른들의 가르침이다. 저녁에는 멀건 보리죽 한 사발을 단숨에 마시고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잠을 자면 몸을 움직이지 않아 에너지를 아낄수 있다는 지혜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그렇다고 잠이 금방 오는 것도 아니다. 그 결과야 보나마나 뻔해 어린이 대량생산이다. 그렇게 진절머리 나던 보리밥 식당이 오늘날 그 원조라 할 시골에까지 확 퍼져있다. 즐거움도, 슬픔도 옛것은 다 그리운 건가. 요즘 버거운 살림살이로 산다는 것이 장난이 아니다. 힘든 세월 당당하게 또 한번 이겨보자고 짜낸 지혜가 고작 보릿고개의 꽁보리밥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