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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 : 서녘 하늘..
문화

포토에세이 : 서녘 하늘

일간경북신문 기자 gbnews8181@naver.com 입력 2023/05/07 16:25 수정 2023.05.07 16:27

미용실 싸인볼이 돌아가고 있다. 작은 간판 아래 ‘Open'이라 적힌 조명등에도 불이 켜졌다. 문을 열자 원장이 키우는 반려견이 먼저 반긴다. 익숙함이 느껴진다면 단골이 되었다는 말이다. 알아서 가운을 꺼내 입고 소파에 앉아 순서를 기다린다. 원장은 먼저 온 손님의 머리카락을 펌 롯드에 감으며 친근한 모습으로 어서 오란다. 원장이 반기는 온도가 내겐 맞춤하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 우려낸 차의 온도 같다.
어르신의 가늘고 짧은 머리카락은 일정한 간격으로 롯드에 감겼다. 넓지 않은 공간이라 어르신과 원장이 나누는 대화를 원하지 않아도 듣게 된다. 어르신은 몇 해 전 지진이 발생했을 때의 공포를 세세하게 묘사한다. 고생하고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소유한 상가 건물의 피해와 정신적 트라우마의 증상까지. 소리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빈도가 잦아지고, 어디든 선뜻 가지 못하고 움츠러드는 생활을 한다고. 하기야 사람들을 만나면 돈밖에 더 쓰겠냐고 한다. 원장은 고분고분한 말씨로 어르신을 대한다. 그리고 지진 트라우마 센터에 가보시기를 권한다. 무료 상담이라는 말도 빠트리지 않는다. 손님들을 상대하는 원장의 대화법에는 공감과 진심이 담겼다. 그래서인가 머리 스타일을 맡긴 동안 자신도 모르게 주절주절 속내를 털어놓게 된다.
헤어 캡을 덮어쓴 어르신과 내가 자리를 바꾸어 앉았다. 염색약을 바르면서 원장은 내 머리카락 상태를 짚어준다. 그때, 한눈에 봐도 멋쟁이 손님 한 분이 들어온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자신은 딸과의 약속이 있고, 오늘은 시내 맛집을 갈 거라 말한다. 피자와 소금빵과 커피 맛이 일품인 집이란다. 최근에 아귀찜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집을 찾았다며 추천한다. 원장이 식당 상호를 묻자, 핸드폰을 꺼낸다. 요즘은 돌아서면 잊어버려서 검색해야 한다는 그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뒤로 젖힌다. 그분의 연세는 여든셋, 딸의 나이는 예순셋. 스무 살의 나이 차이지만 같이 다니면 자매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에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분은 일흔셋까지 한의원의 직원 식당에서 일하셨단다. 일할 때는 즐겁게 해야 힘들지 않고, 그러다 보니 일이 즐거웠다고. 일할 수 있을 때가 좋은 거라고 덧붙인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 원장의 말에 그분은 서슴없이 답 한다. 마음이 늙지 않아야 한다고. 몸과 마음이 같이 늙어야 서글픔이 덜 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마음이 늙으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해. 움직이고 찾아다니고 배워야지. 그렇지 못하면 더 늙어버린단 말이야. 젊은이들은 꾸미지 않아도 빛이 나지만 나이가 들면 빛이 점점 사라져. 나이가 들수록 꾸며야지. 일이든 꾸밈이든 최선을 다해야한다며, 심지어는 웃는 것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단다.
염색하는 동안 어르신과 그분이 차례로 미용실 문을 나섰다. 평생을 고생했다 말하던 어르신은 굽은 허리 대신 당당히 상가를 세웠고, 마음이 늙지 않는 그분은 맛집을 찾아 나서는 발걸음이 가뿐하다. 두 분의 뒷모습에서 여름날 석양이 물드는 서녘 하늘이 떠오른다. 살아내느라 치열했던 한낮의 수고가 저문다. 최선을 다해 살았고,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 석양이 아름다운 건 어디 서녘 하늘뿐일까.

 

소정 (嘯淨)<br>▶글 쓰는 사람들의 모임 ‘에세이 문’ 회원<br>▶ ‘포항여성사진회’ 회원
소정 (嘯淨)
▶글 쓰는 사람들의 모임 ‘에세이 문’ 회원
▶ ‘포항여성사진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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