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거나 다르거나
▲ © 김찬겸
‘탄소 형제에게 하늘의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상생활은 그만두고 땅속의 시련을 겪어 보거라, “너희의 공기생활은 끝났다.” 이 말에 아우는 도망치고 형은 땅속으로 들어갔다. 비바람이 불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그 둘은 눈을 떴다. 동생은 시커먼 숯이 되어있었고, 땅속 엄청난 열과 압력을 견딘 형은 다이아몬드가 되어 있었다.’ 정채봉의 에세이 집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 중 숯과 다이아몬드에 나오는 얘기의 일부이다.
전혀 다른 물질 같은 숯과 다이아몬드는 원자들의 결합형태만 다를 뿐 순수 탄소 구성채로서 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다.
‘우라늄 형제에게 하늘의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그 단단한 힘(핵력)을 인류에게 나누어 주어라. 이 말에 아우는 땅속에서 그 강한 힘을 한 순간에 분출하는 실험들을 했고, 형은 땅 위에서 차분히 그 힘을 연구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그 둘은 눈을 떴다. 동생은 순간의 힘을 자랑하는 원자폭탄이 되었고, 형은 그 힘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활용하여 원자력발전소가 되었다.’
전혀 다른 물질 같은 원자폭탄과 원자력발전소는 핵반응의 속도와 우라늄의 구성비만 다를 뿐 순수 우라늄(또는 플루토늄)의 구성체로서 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다.
숯과 다이아몬드, 원자폭탄과 원자력발전소. 우린 숯을 보고 다이아몬드를 떠올리지 못하듯 다이아몬드를 보고 숯을 떠올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린 원자폭탄을 보고 원자력발전소를 연결하고 원자력발전소를 보고 원자폭탄을 상상한다. 그 쓰임이 확연히 다른데도 말이다.
지상의 모든 전쟁 무기를 버리고 평화만을 얘기하자며 자국의 모든 무기를 버리고 병력을 없애면 주위의 모든 나라들이 무기와 병력을 버린 나라를 쫓아 평화를 다짐하면 좋으련만, 원자력발전소의 혹시 모를 우려를 막을량 원자력발전소를 정지시키고 건설과 계속운전을 막으면 주위의 이웃나라들이 우리에게 전기에너지 자비를 베풀면 좋으련만. 이상과 현실이 같으냥 다르기만 하다.
약 500년 전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는 그도 도를 깨우쳐 바른 정치를 꾀하려했던 성리학자였고 약 250여 년 전 수원 화성을 축성했던 그도 도를 깨우쳐 만 백성의 이득을 도모했던 실학자였다.
방위력과 에너지는 자국의 상위 몇 %를 위한 일부만의 것이 아닌, 만 백성의 것이다. 지금 당장 조금의 군사력 상실에도 에너지 부족에도 상위 몇 %의 어떤 백성들(?)은 두렵지 않으리라. 그러나 중·하위 층의 만 백성들은 그 조금의 변동에 오금이 저리고 손이 떨리며, 차디찬 이 겨울 목숨이 안타까워진다.
나와 다르다고 틀리지 않는 그런 곳에서 원자력 발전을 하여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