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男子이고자 하는 이유
▲ © 배동현 언론인
우리는 봄의 길목에서 느닷없이 닥치는 추위를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라고 쉽게 정의하고 말하지만 차분한 마음으로 유심히 바라다보면 꾸준한 변화를 통해 새로운 계절을 만들어가는 자연의 지혜와 이치가 베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봄은 그저 오는 것이 아니다. 며칠 따뜻하면 겨울이 끝나는가 싶어 두꺼운 옷을 벗어 던진다. 한 며칠 봄기운에 들떠 있다 보면 그것보란 듯이 이내 추위가 맹위를 떨치곤 한다. 살다보면 좋은 일이 있는가 싶으면 나쁜 일이 생기는 이치 또한 자연의 운행에 기인한다. 그러기에 선현들은 好事多魔(호사다마)라 하여 좋은 일이 생기면 마음 닦기를 게을리 하지를 않았다. 들꽃은 민족의 꽃이다. 겨레의 위상을 꿋꿋이 지켜온 끈질긴 꽃이다. 격렬하지 않으면서도 나중에 보면 재가 남을 만큼 불꽃이고, 소매를 스치듯 밋밋한 것이나 헤어진 뒤 가슴을 만지면 심장이 으깨져 핏물을 쏟을 만큼 감동적이다. 화끈한 사람들이 볼 때는, 그것도 만남이냐 싶을 정도로 작고 보잘것없어 하찮아 보이는 것이 후에 문득 어른어른 생각나는 것이 들꽃이다. 시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도 이런 것이 아닐까. ‘작은 초가라서 처마가 짧아 무더위에 푹푹 찔까 몹시 걱정돼, 서늘한 솔잎으로 햇살을 가려 한낮에도 욕심껏 그늘 얻었네, 새벽에는 이슬 맺혀 목걸이로 뵈고 밤에는 바람 불어 음악으로 들리네, 그러나 불쌍해라! 정승 판서 집에는 옮겨 앉는 곳마다 실내가 너무 깊네.’ 조선조 제일의 시인이라 칭송받는 권필(1569-1612)의 松棚(송붕)이란 詩의 해설본이다. 송붕은 시원한 그늘만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새벽이면 이슬이 맺히고 밤이면 솔바람소리 시원하여 마치 귀족들이 차고 다니는 목걸이 같고 현악기의 합주처럼 들린다고 했다. 이 詩속에는 시대의 역사가 있고, 당대의 문화가 있다. 또 그 이면에는 보석 같은 문학과 철학이 숨쉬고 있다. 몇해전인가 어느 척추장애인의 시집 출판기념회의 기사를 읽고 가슴 뭉컬했던 기억이 아직도 내 마음에 선하다. 소외계층의 아픔이 하도 절절해 복지의 실태를 조금이나마 알리고자 기사내용을 인용해 언론에 소게한 일도 있었다. “아픈 몸도 다 버리고/나무 지팡이도 다 버리고/가벼운 몸으로/새처럼 자유롭게/ 하루만 단 하루만이라도/훨훨 날아봤으면.” 시인의 딸이 어머니의 시를 낭송하자 시인도, 딸도, 시집 출판을 축하하러 온 동네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참지 못해 마을회관은 울음바다가 됐다고 전한다. 그해 전남 진도군의 척추장애 시인 주경자(53)씨의 출판기념회의 뒷이야기 이다. 산골 여인 주경자의 ‘하루만 날아봤으면’이란 제목의 첫 시집을 축하해주기 위해 주민들이 열어준 조촐한 잔치였다. 등이 구부정 굽고 다리 근육이 퇴화한 병까지 겹쳐 걸을 수 없는 주씨는 “아버지가 차라리 죽어라며 어린 나를 물 한 방울 안 먹이고 방에 방치하여 영양실조로 이렇게 됐다”며 자초자종을 설명했다. 주씨는 걸을 수 없어 마당을 무릎으로 기어 다닌다. 욕지거리를 퍼붓던 아버지가 미워 그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춘기 때. 구두 신고 사뿐사뿐 걷는 발걸음을 보면, 죽기 전에 꼭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렇게 걷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때마다 걷지 못 할 바엔 차라리 죽어버리자며 여러 번 자살을 시도 하곤 했다. 주씨는 딸을 낳고 나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 작은 몸뚱어리에서도 소중한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는 사실에 세상이 정말 아름답게 보였어요.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항상 아름다운 말, 사랑을 주는 말만 하며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런 주씨에게 남편 강금성(50)씨는 하늘이 보내준 선물’이었다. 주씨는 “집밖에 나가지 못하는 내가 창문을 열어놓고 부르던 노랫소리가 뒷마당 대나무 바람에 실려 남편이 살던 윗마을 오두막집까지 들렸나 봅니다”라며 노래를 들은 남편이 찾아 온 인연으로 결혼했다. 주씨는 8년 전 몸이 아파 병원에 갔다가 암종양의 판정을 받았다. 주씨는 “수술을 해야 하지만 몸이 약해 수술이 불가하다는 의사 말을 듣고 포기를 결심했다. 주씨의 유일한 치료약은 남편 강씨가 산에서 캐다주는 영지버섯과 운지버섯으로 달인 물이 전부였다. 남편 강씨도 몸이 성치 않다. 남편이 빈혈로 자주 쓰러져 서로 죽을까봐 매일 떨며 산다는 주씨의 푸념이다. 그는 삶의 곡절을 모두 시로 녹여낸다. 이날 인사말에서 그녀는 시 한수로 답례했다. “울고 웃는 인생이라/세상을 한탄할 일도 많겠지만/육신이 허술하면 마음으로 살고/마음이 허술하면 육신으로 이기며/살아 있으매/사랑을 노래할 수 있고/살아 있으매/인생을 노래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詩 한 수로 소외된 이에게 힘든 세월을 견딜 수 있게 눈물을 닦아주고, 詩한수로 세상의 도리를 깨우쳐 주며, 詩한수로 신천지를 열게 도와준다. 희망의 꿈을 꾸게 하는 감동의 敍事詩(서사시), 그 길 위에 나는 이제 서 있다. 가야 할 길이 좀 늦었다 해도 이 길 위의 男子이고자 고집한다. 지난달 계사장초 4호지 시집을 발간 한국시인연대에서 연대상 본상을 수상했다. 돌같이 굳어가는 못난 마음을 詩로 용해하는 마술사가 되고자하는 것이 오늘이 내게 준 가파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