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적·투명한 운영 필요성 대두...정감독 이후 행보에 주목
박현정(52)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이사가 막말·성추행·인사전횡 의혹 논란이 시작된 지 27일 만에 자진 사퇴했다. 내년 재단법인 출범 10주년을 앞두고 내홍을 앓던 서울시향은 일단 한숨을 돌리게 됐다.
서울시향은 잇따른 외국 진출에 이어 지난해 유료관객 92%를 기록하는 등 성장세를 이어왔다. 특히 올해 8월 120년 역사의 세계적인 클래식 음악 축제인 BBC 프롬스에 NHK 심포니 이후 아시아 오케스트라로서는 두 번째로 초청을 받는 등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반열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았다. 내년 4월 미국 순회 연주 등 굵직한 사업을 계획 중이다.
하지만 올해 말 박 대표에 대한 각종 의혹이 폭로되자 박 대표가 정명훈(61) 서울시향 예술감독이 시향을 사조직화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진통을 앓았다.
◇효율적이고 투명한 운영 필요성 제기= 이번 서울시향 사태의 본질을 박 대표와 정 예술감독의 반목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박 대표와 정 예술감독의 불화설은 이미 여러 차례 나돌았다. 그간 서울시향은 박 대표가 경영부문을, 정 예술감독이 예술과 관련된 부분을 맡는 방식으로 운영돼왔다.
하지만 박 대표의 경영방식에 대한 직원들의 불만이 쏟아지자 정 예술감독이 박 대표에게 자제할 것을 요구한 것이 갈등의 불씨가 됐다는 것이다. 박 대표가 이를 언짢아하면서 갈등이 증폭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 예술감독 역시 박 대표의 거친 행보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 사회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박 대표는 서울시향의 첫 여성 대표다. 그러나 공연예술 분야와는 인연이 없는 고객관계관리(CRM) 전문가여서 임명 당시 뜻밖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삼성금융연구소 선임연구원, 삼성화재 고객관리 파트장, 삼성생명 경영기획그룹장·마케팅전략그룹장(전무) 등을 지냈다.
박 대표 취임 직전 대표 자리는 1년가량 공석이었고 서울시향은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을 비롯해 서울시가 당시 박 대표를 간절히 원했던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부임한 박 대표에게 서울시향 사무국 직원들의 행정 업무는 미숙해 보였다. 그녀는 "처음 서울시향에 왔을 때 방만하고 비효율적이고 나태한 '동호회적'인 문화에 놀랐다"고 몇 차례 언급한 바 있다.
일부에서는 그러나 예술단체 특유의 조직 문화에 대한 박 대표의 이해가 부족했다고 지적한다. 한 클래식 관계자는 "계산적이기보다 감성과 감정 위주로 돌아가는 예술단체이다 보니 일반 기업에서 잔뼈가 굵은 기업인에겐 답답하게 보였을 것"이라면서 "예술가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이들을 좀 더 너그럽게 볼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울시가 서울시향의 운영기금을 출연하는 만큼 서울시향은 좀더 투명하게 운영돼야 한다는 지적도 상당수다.
2011년 서울시의 서울시향 출연금은 131억원이었다. 그러나 올해 서울시향의 예산 173억원 중 108억원을 지원하는데 그치는 등 출연금 규모는 갈수록 줄고 있다. 내년에는 102억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서울시향의 경영 비효율성에 대한 지적이 여러차례 나왔기 때문에 이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내년 미국 투어 등의 예산이 삭감됐다. 이 투어는 서울시향의 향후 활동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 있는 공연이다. 수년 전부터 숙원사업으로 거론된 서울시향 전용홀 건립은 예산 부족으로 아직 본격적인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클래식 관계자는 "줄일 것은 줄이되 미국 투어, 전용홀 건립 등 서울시향 발전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업은 확실히 지원해줘야 한다"면서 "지원에도 옥석을 가리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향후 새 대표 선임도 중요한 과제다. 경영과 예술, 두 가지 부문에서 경험과 안목을 갖춘 적임자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 정명훈 예술감독의 이후 행보 주목= 30일로 예정된 서울시향 이사회에서 판가름나겠지만 정 예술감독에 대한 재계약 가능성은 크다.
정 예술감독은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인정 받는 거장이다. 정 예술감독과 대척점에 섰던 박 대표조차 정 감독이 훌륭한 음악가라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 분을 다시 (서울시향이) 가지기는 쉽지 않다. 지휘자는 성장하기 힘든 것 같다"고 말했다.
정 예술감독은 재단법인으로 독립된 9년 전부터 서울시향을 이끌어왔다. 그가 예술감독으로 취임하기 전해의 서울시향 유료 티켓 판매율은 38.9%에 그쳤다. 올해에는 92%를 넘겼다. 서울시향의 해외공연 역시 이 단체의 공연기획 자문위원이자 정 예술감독과 절친한 사이인 마이클 파인이 주도해왔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 서울시향에는 양날의 칼로 작용했다. '정명훈의 서울시향'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그가 떠나면 서울시향은 그동안 쌓아온 명성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고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언론사 사회부장들과 만난 자리에서 정명훈이 아니면 "대안이 있냐"고 반문할 정도다.
정 예술감독은 상임지휘자 겸 음악감독으로 임명된 2005년 이후 9년간 서울시향으로부터 140억원을 받았다. 1년에 15억원 가량 가져간 셈이다. 내년 서울시향 예산이 삭감된 만큼 그가 재계약하면 받게될 돈은 12억원 안팎으로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실제 정 예술감독의 명성에 비하면 그가 받는 돈은 많다고 할 수 없다. 미국 오케스트라정보사이트(adaptistration)와 LA타임스 등에 따르면 2011·2012 시즌에 시카고 심포니의 리카르도 무티 217만달러(약 24억원),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마이클 틸슨 토마스가 203만달러(22억원),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의 크리스토프 에센바흐가 193만달러(21억원) 등을 받았다. 내년 내한하는 LA필하모닉의 젊은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이 143만달러(16억원)이었다.
한 클래식계 관계자는 "정 예술감독의 연봉은 세계적으로 볼 때 높지 않지만 아직 국내 클래식계 저변이 넓지 않고 서울시민 세금인 만큼 일반 대중이 느끼기에는 다소 큰 금액"이라면서 "향후 정 예술감독이 그런 인식을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을 더 해야 한다. 아울러 클래식 저변을 넓히기 위한 종사자들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정 예술감독은 내년 11월18~1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살아있는 서양음악사'로 불리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를 지휘하는 등 서울시향 외 활동도 예정돼 있다. 세계적으로도 파보 예르비 등 한 오케스트라에서 몸담으면서 다른 여러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거장들이 상당수다. 정 예술감독이 이를 얼마나 슬기롭게 조화시키는 지도 관건이다.
이와 함께 정 예술감독이 서울시향을 사조직처럼 운영했다는 박 대표가 제기한 의혹도 해소해야 할 부분이다. 서울시는 정 예술감독이 개인 일정 때문에 서울시향 공연 일정을 임의로 변경했다는 박 대표의 주장을 조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