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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경북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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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경북의 소리

운영자 기자 입력 2015/02/09 17:09 수정 2015.02.09 17:09
사람 사는 세상이 더 그립다
▲     © 房 玘 泰 편집국장
‘죽을 만큼 열심히 일하면 나도 가능한 겁니까’는 ‘미생’ 드라마 사진전을 여는 대구의 어느 백화점 문 앞에 내건 말이다. 여기에서 가능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무척이나 궁금하다. 아마도 돈일까. 권력일까. 사회적인 지위일까. 아니면 이 모두일까.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독자의 몫이라고 할망정, 당대를 짚어내는 단 한마디의 말이다. 가난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그 무엇도 할 수가 없는 지금이다. 부(富)이라는 이름을 가져야만, 그 어떤 일이라도 할 수가 있다고 여긴다면, 부가 없는 이들은 그냥 보고만 있어야할 판이다. 돈 앞에서는 귀신도 운다는 말이 그냥 생긴 말이 결코 아니다. 귀신도 울린다는 돈이 도대체 다 어디로 갔는가. 돈다고 돈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항상 돈은 나를 빼고 돌고만 있다. 돈을 아무리 사랑해도 나를 포함한 쌍방향이 아니고, 한쪽으로만 쏠린 빈 쪽짜리 사랑이다. 빈 쪽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서럽다.
보건사회연구원은 최근에 작년 실시된 9차년도 한국복지패널 조사(조사 대상 가구 7천48가구) 결과를 담은 ‘2014년 한국복지패널 기초분석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이전 조사(8차년도 조사)에서 저소득층이었던 사람 중 중산층 혹은 고소득층으로 이동한 사람의 비중인 빈곤 탈출률은 22.6%이다. 이는 역대 최저 기록이다. 저소득층 4.5명 중 1명만 빈곤 상태에서 탈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빈곤 탈출률은 1차년도와 2차년도 사이 조사에서 32.4%를 기록했다. 그렇지만 이후부터 점점 낮아져 8년 사이 10% 포인트 가까이 추락했다. 저소득층 중에서는 22.3%가 중산층으로 이동했다. 이 역시 지난 8년간의 조사에서 가장 낮았다. 중산층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고소득층으로 신분이 수직 상승하는 경우는 0.3%에 그쳤다. 이는 8년 전 2.5%에 비하면 8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죽을 만큼 일해도 내 주머니는 텅 비었다는 통계이다. 빈 주머니를 들여다보면, 나의 어항을 다른 사람이 투망질했는가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어항 투망질의 이유는 근로로써 돈을 벌기보다는 자본이 돈을 버는 속도가 빠른 데에 원인한다고 본다. 근로와 자본과의 다툼에서 근로가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근로는 운다. 갑(甲) 앞에서 을(乙)은 무릎을 꿇는다. 이게 신자유주주의 근본속성이다. 을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가계의 세금부담 증가속도가 소득의 2배에 달했다.
최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3분기 중 2인 이상 전국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431만4천334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3.6% 늘었다. 가계의 세금 부담은 2010년부터 5년 연속 소득보다는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2010년 가계 소득(전년비)이 5.8% 늘어날 때 조세 지출액은 11.5% 증가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작년 말 현재 근로자 29만3천명이 1조3천195억 원의 임금이나 퇴직금 등을 받지 못했다. 지난해 체불임금 피해 근로자 수와 발생액은 전년보다 각각 9.8%와 10.6% 증가했다. 2009년 30만1천명이 1조3천438억 원의 임금과 퇴직금을 받지 못한 이후 5년 만에 최대 금액이다. 체불의 이유야 어떠하든 갑의 횡포 앞에 을은 분통만 터진다. 분통을 해결할 유일한 수단은 인생을 역전시킨다는 로또이다. 최근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에 따르면, 정부의 지난해 로또 판매 수입은 3조996억 원이다. 1년 전(2조9천798억 원)보다 4.0% 증가했다. 지난해 전체 복권 판매수입은 전년(3조2천234억 원)보다 3.5% 늘어났다. 지난해 로또(4.0%) 및 전체 복권(3.5%) 판매수입 증가율은 모두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인 3.3%를 웃돌았다. 체불과 로또가 다 같은 걸음으로 가는 증가추세이다. 그러니 자세히 들어다보면, 빈곤 탈출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의미인가를 묻고 싶은 대목이다. 개천에서 용(龍)이 난다는 것은 옛말일 뿐이다. 용쓰다 죽어나가겠다.
죽을 때는 참새도 운다고 한다. 사람인들 울지 않겠는가.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신경림/ 가난한 사랑의 노래) 가난이 사랑까지 버려야하는 세상인가. 또 다른 노래도 있다. ‘세상 부귀영화도 세상 돈과 명예도/당신, 당신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죠/세상 다 준다 해도 세상 영원타 해도/당신, 당신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죠/...이대로도 좋아요 아무 바램 없어요/당신만 있어 준다면/당신, 당신, 나의 사람/당신만 있어준다면’(양희은 / 당신만 있어준다면)
가난이든 부자이든 ‘대통령의 시간’에는 가난과 부자의 격차해소의 시간이 없었는가. 가난도 사랑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당신만이 의미를 가진다면, 현실을 어디에서 찾을까. 대물림하는 부와 가난을 어떻게 해결하는가가 당대가 풀어야할 숙제이다. 지금 정치권은 선별복지인가 아니면 보편복지인가를 두고 논쟁이 뜨겁다. 뜨거운 것은 논쟁뿐이니, 을의 일상생활은 추울 뿐이다. ‘36.5도의 체온’오늘따라 사람 사는 세상이 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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