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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한 왕조의 치욕으로 태어나 조선의 자랑’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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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한 왕조의 치욕으로 태어나 조선의 자랑’으로 살아 있습니다"

일간경북신문 기자 gbnews8181@naver.com 입력 2021/03/04 18:37 수정 2021.04.28 19:35
기획시리즈...다산 정약용 '양곡의 노래'1
봄 잠 깨고 나니 들빛이 어둑하다

❶ 봄 잠 깨고 나니 들빛이 어둑하다

양곡(暘谷)의 노래, 다산 정약용

 * 양곡은 ‘동쪽의 해가 처음으로 뜨는 곳’을 말한다.『서경書經』의「우서 요전虞書堯典」에서 나오는 말이다. 

다산(茶山)은 1801년 3월 9일 장기로 유배 와 이곳에서 7개월을 머물러 있었다. 장기에서 <기성잡시(鬐城雜詩)> 27수를 비롯해서 <장기농가(長鬐農歌)> 10수, <고시(古詩)> 26수 등 130여 수의 한시(漢詩)를 남겼다 

공자가 태산을 지나는데, 한 부인이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다. 공자가 자로를 시켜 연유를 물으니, 부인이 말했다. “예전에 아버님이 호랑이에게 물려 돌아가시고, 남편이 또 물려 죽더니, 이제 내 아들이 또 죽었습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어째서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가“ 하니, “여기에는 가혹한 정치가 없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공자가 “기억해 두어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사나운 것이다.”고 했다. 

『예기(禮記)』「단궁하」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때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제자들과 제나라로 가던 중이었다. 태산의 곁을 지나면서 만난 여인, 호랑이에게 시아버지와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서도 마을로 내려가지 못하는 여인.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차별적인 세금으로 백성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버리는 가혹한 정치였다.

이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오버랩되는 시가 있다. 바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애절양(哀絶陽)>이다.

<애절양>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되는 시이며, 다산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 중의 하나다. 시인 김남주도 <전론(田論)을 읽으며>에서 다산을 노래하면서 맨 먼저 <애절양>을 떠올렸다. 

“200년 전 그대는 한 왕조의 치욕으로 태어나 조선의 자랑으로 살아 있습니다. 귀양살이 18년 혹한 속에서도 그대는 만권의 책 탑으로 쌓아놓고 고금동서를 두루두루 살피셨습니다.(…) 나라 걱정 백성 사랑/ 때로는 탁한 세상 하 답답하여/ 탐진강 강물에 붓대를 휘저었습니다. 애절양(哀絶陽)이여, 애절양(哀絶陽)이여,(…)” 

애절양(哀絶陽) ‘남자의 생식기를 자르는 슬픔’이라는 제목의 이 노래는 우리들을게 한없이 슬프게 한다.
 
蘆田少婦哭聲長(노전소부곡성장) 노전마을[갈밭마을] 어린 아내의 긴 통곡 소리
哭向縣門號穹蒼(곡향현문호궁창) 관청의 문을 향하여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네
夫征不復尙可有(부정불복상가유) 전쟁에 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할 수는 있어도
自古未聞男絶陽(자고미문남절양) 남자가 자신의 생식기를 잘랐단 소리 들어보지 못하였네
舅喪已縞兒未操(구상이호아미조) 시아버지 삼년상 이미 지냈고, 아이는 아직 젓물도 안 말랐는데
三代名簽在軍保(삼대명첨재군보) 조·자·손 삼대(三代)의 이름이 군보에 모두 실려 있네
薄言往愬虎守閽(박언왕소호수혼) 관청을 찾아가 아무리 호소해도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里正咆哮牛去皁(이정포효우거조) 이정은 으르렁대며 마구간의 소마저 끌고 가버리네
磨刀入房血滿席(마도입방혈만석) (남편이) 칼을 갈아 방에 들어갔는데 자리에 피가 가득
自恨生兒遭窘厄(자한생아조군액) 자식을 낳았기에 액을 만났다고 스스로 한탄하네
蠶室淫刑豈有辜(잠실음형기유고) 잠실음형은 어찌 죄 있어선가
閩子去勢良亦㥻(민자거세량역척) 민나라 자식의 거세도 정말 또한 슬픈 일이네
生生之理天所予(생생지리천소여) 자식을 낳고 살아가는 이치는 하늘이 준 것이고
乾道成男坤道女(건도성남곤도녀) 하늘 도(道)로 아들이 되고, 땅의 도(道)로 딸이 되네
騙馬분축猶去悲(편마분축유거비) 거세한 말과 돼지도 오히려 슬플텐데
況乃生民思繼序(황내생민사계서) 하물며 대(代)를 이어갈 백성들은 오죽하겠는가
豪家終歲奏管弦(호가종세주관현) 부호들은 일 년 내내 풍악을 연주하면서
粒米寸帛無所損(입미촌백무소손) 쌀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는 일 없으니
均吾赤子何厚薄(균오적자하후박) 다 같은 백성인데도 후박(厚薄)은 어찌 이다지도 다른가
客窓重誦시鳩篇(객창중송시구편) 객창에서 『시경』의 <시구>편을 거듭거듭 외워보네

조금의 희망도 없는 현실 앞에서 자신의 생식기를 잘라야 하는 남편과, 그것을 본 아내의 통곡에 가슴이 아려온다. 기가 막힌 것은 관리와 부호들의 모습이다. ‘다 같은 백성인데도 후박(厚薄)은 어찌 이다지도 다르단 말인가.’ 

이 시의 마지막에 적고 있는『시경』「조풍(曹風)」의 <시구(시鳩)>편은 미물보다 더 못한 인간[탐관오리]에 대한 다산의 통렬한 비판이며, 대동사회를 갈구하는 다산의 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뻐꾸기 뽕나무에 앉아 있는데, 새끼는 일곱 마리. 숙인군자(淑人君子)여, 그 모습 한결같구나, 그 모습 한결같구나. 마음이 맺혀있는 듯하구나.(…)[시鳩在桑其子七兮淑人君子其儀一兮其儀一兮心如結兮(…)]”

“뻐꾸기는 새끼를 먹일 때 아침에는 위에서 아래로, 저녁에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며 먹이니 공평하기가 한결같다.[시鳩(…) 飼子 朝從上下 暮從下上 平均一如]” 곧,『시경』의 <시구>편은 군자의 공평무사(公平無私)함과 시종여일(始終如一)됨을 노래한 것이다. 

뻐꾸기도 자신의 새끼를 아끼면서 먹이를 먹이면서 공평하게 한결같이 먹이는데, 작금(昨今)의 조선의 관리들은 어떠한가? 백성들을 슬픔으로 몰아가는 근원은 백성들을 착취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데 있었다. 돌아가신 지 삼 년이 지난 시아버지를 여전히 군보(軍保)에 남겨두는 것과,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아이를 군보에 올린 것은 착취를 위한 행태이다. 가장(家長)의 거세(去勢)의 궁극적인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홀연히 입을 다문 제비는 무슨 생각일까? 쓸데없는 소동파를 배운다고 바둑을 배우지 못했구나

다산의 학문적 깊이에 대해서 금장태 교수는 “어떤 사상가는 들판에 솟아오른 봉우리 같아서 전체 규모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데, 정약용의 경우는 워낙 큰 산줄기라서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무수한 봉우리들이 이어져 있고 깊은 골짜기가 사방으로 뻗어 있다. 어느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 보아도 전체의 모습은 짐작조차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약용은 한 번 거쳐 가는 사상가가 아니라 평생을 두고 연구해야 할 만큼 풍부한 세계를 간직한 사상가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다산이 포항과 인연을 맺게 된다. 1801년에 일어난 이른바 ‘신유박해(辛酉迫害)’에 의해서이다. 신유박해 때 형인 정약종이 목숨을 잃게 되고, 다산은 겨우 목숨을 보존하고 1801년 3월 9일 경상도의 장기(長鬐)로 유배를 오게 된다. 

장기로 온 다산은 7개월을 장기 마산리에 머물게 된다. 이곳에서 다산은 <기성잡시(鬐城雜詩)> 27수를 비롯하여 <장기농가(長鬐農歌)> 10수, 고시(古詩) 27수 등 130여 수의 시를 남겼다. 

장기에 와서 처음 지은 시로 여겨지는 <홀로 앉아서[獨坐]>를 보자. 이 시는 2수가 전하는데,『다산시문집』권4에 실려 있다.

두 수 중 첫 번째 시이다.

홀로 앉아선(獨坐)

旅舘蕭寥獨坐時(여관소요독좌시) 여관에서 하릴없이 적적하게 홀로 앉아 있을 때면 
竹陰不動日遲遲(죽음부동일지지) 대 그늘도 가만히 하루는 길기만 하네
鄕愁欲起須仍壓(향수욕기수잉압) 향수 일어나려는 걸 억지로 누르고
詩句將圓可遂推(시구장원가수추) 생각을 가다듬고 시구를 다듬는다네 
乍去復來鶯有信(사거부래앵유신) 잠깐 갔다가 다시 오는 꾀꼬리 미더운데 
方言忽噤鷰何思(방언홀금연하사) 홀연히 입을 다문 제비는 무슨 생각일까 
只饒一事堪追悔(지요일사감추회) 다만 한 가지 매우 후회되는 것은
枉學東坡不學棋(왕학동파불학기) 쓸데없는 소동파를 배운다고 바둑을 배우지 못했음을                
신유박해로 의금부에서 고초를 겪다 겨우 목숨을 보존하고 유배를 온 다산이다. 낯선 곳 장기(長鬐)에서 많은 생각이 일어났을 것이다. 무엇보다 다산은 정조에 대한 추억이 떠올랐으리라. 실상 다산에게서 정조의 존재는 종자기와 같은 인물이었다. 자신의 학문을 알아주고 펼칠 수 있도록 보살펴준 정조의 죽음은 다산에게는 큰 대들보가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다.  
정조가 다산을 얼마나 각별히 아꼈는지를 살필 수 있는 글이 있다. <6월 12일『한서(漢書)』를 하사받고 삼가 그 은덕에 관하여 쓰다[六月十二日蒙賜漢書恭述恩念]>라는 시의 병서(幷序)에서이다. 

“그날 밤 달빛이 유난히 맑아서 혼자 죽란(竹欄)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보니 내각의 아전이었다. 손에 『한서선(漢書選)』10권이 들려있었는데, 임금의 말씀을 전하기를, “주자소(鑄字所)를 지금 다른 곳에다 옮겨지었다. 벽이 아직 마르지 않았으니 조금 기다렸다가 들어와서 다시 나를 위해 이전처럼 종전처럼 교서(校書)도 하고 숙직[直宿]도 하라. 그리고 지금《한서선》10권을 내리니, 마땅히 제목(題目)을 써서 5권은 도로 들이고, 나머지 5권은 집에서 보관하여 대대로 전하는 물건으로 삼으라.” 하였다.

이처럼 은혜로운 말씀이 자세하셨고, 아끼시는 마음이 깊고도 중하셨음이라(…) 그 다음날부터 몸이 좋지 않아 28일에 승하하시고 말았다. 이러니 이《한서선》10권은 바로 군신(君臣) 사이의 영원한 이별을 알리는 선물인 것이다. 그래서 책을 안고 통곡하여 흐느끼면서, 그날의 시를 추가하여 기록한다.”

이글은 시를 지은 이유를 적은 글이다. 정조는 다산을 위해 주자소를 옮겨 짓고,『한서선(漢書選)』10권을 내려 주며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정조가 다산을 얼마나 아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산은 정조가 이승의 삶을 마치기 전에 주었다는 마지막 선물인『한서』를 부여잡고 흐느끼고 통곡한다. 

다시 <독좌(獨坐)>를 보자. 이 시의 기련(起聯)에는 낯선 장기 땅에서 당황하고, 방황하며, 무료하게 하루를 보내는 다산의 모습이 느껴진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하릴없이 지내는 하루는 너무나 길고도 길었다. 그런 와중에 일어나는 생각들이 다산을 괴롭힌다. 그래서 애써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시를 짓고 다듬는다. 

시(詩)는 자신의 생각을 펼쳐내는 통로이다. 하지만 지금의 다산에게서 시는 계속해서 일어나는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방법이다. 그래서 시를 쓰고 다듬는다. 그러다 꾀꼬리에게로 눈을 돌리고, 제비에게로 생각을 보낸다.

하지만 일어나는 생각과 슬픔을 누르기 위해 쓰는 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바둑을 배울 것을. 촌로들과 함께 두는 바둑에서 시절의 한을 잊을 수 있을 터인데, 하필이면 소동파를 따랐을까. 

소동파를 배우지 않았다면 유배의 슬픔이 없었을까? 다산은 귀양살이에서 풀려 돌아가던 중에 사망한 소동파를 떠올리며, 자신의 현재를 돌아보고 있다. 하필이면 왜 ‘나는 동파를 배우고 따랐을까?’ 장기에 유배를 오게 된 날, 그것을 되묻고 있는 것이다.

“눈[目]은 녹음방초를 보고 있지만, 마음은 말라죽은 나무나 물기 없는 재와 같은”(<독좌>2수) 좌절과 슬픔의 마음으로, 그렇게 다산의 포항에서의 생활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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