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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경북신문

아버님은 아시는지요 모르시는지요, 어머님은 아시는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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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은 아시는지요 모르시는지요, 어머님은 아시는가요, 모르시는가요

일간경북신문 기자 gbnews8181@naver.com 입력 2021/03/25 18:28 수정 2021.04.28 14:55
기획시리즈...양곡의 노래2
어느 이른 봄날에 맞닥트린 슬픔


3월 9일 장기(長鬐)에 도착하였다. 그 다음날 마산리(馬山里)에 있는 노장교(老莊校) 성선봉(成善封)의 집을 정하여 머물게 되었다. 긴긴 해에 할 일이 없어 수시로 짧은 시구를 읊었다. 섞었기에 순서는 없다.[三月初九日 到長鬐縣 厥明日安揷于馬山里老校成善封之家 長日無事 時得短句 雜而無次]

이 글은 다산(茶山)이 장기에 도착해서 지은 <기성잡시(鬐城雜詩)> 제목 아래에 적혀있는 내용이다. 1801년 3월 9일에 장기에 왔고, 마산리에 있는 성선봉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2월 28일에 남대문을 출발했으니, 장기까지 열흘이 걸렸다는 이야기다. 
다산의 시문집에는 유배가 결정되고, 장기로 유배를 오는 과정에서 가족과의 이별, 그리고 충주의 하담을 들러 부모님의 묘소를 참배했던 과정이 적혀있다.
<석우에서의 작별[石隅別]>이라는 시를 보자. 시 제목의 아래에 “가경(嘉慶) 신유년(순조 원년, 1801) 1월 28일 내가 소내[苕川]에 있다가 불행이 있을 것을 알았다. 서울로 들어가 명례방(明禮坊)에서 머물렀다. 2월 8일에 대각에서 논의가 시작되고, 그 이튿날 새벽에 옥에 수감되었다가, 27일 밤 2경에 성은으로 옥에서 풀려나왔고, 장기현(長鬐縣)으로 유배가 정해졌다. 그래서 그 이튿날 길을 뜨는데, 그때 제부(諸父)ㆍ제형(諸兄)들이 석우촌(石隅村)에 와서 서로 작별하였다.[嘉慶辛酉正月二十八日 余在苕川 知有禍機 入京住明禮坊 二月八日臺參發 厥明日曉鍾入獄 二十七日夜二鼓 蒙恩出獄 配長鬐縣 厥明日就道 諸父諸兄至石隅村相別]”라고 적고 있다. 
이글에서 다산은 1월 28일에 자신에게 불행이 닥칠 것을 미리 알고서 명례방(지금의 명동 주변)으로 가 그곳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2월 9일에 옥에 수감 되었고, 2월 27일에 장기현으로의 유배가 결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음날인 28일에 석우촌을 떠나 유배길에 오르는 것으로 적고 있다. 다산이 친지들과 이별한 석우촌은 숭례문(崇禮門)에서 남쪽으로 3리(里, 1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마을이라 하였으니, 지금의 남대문 주변에서 친지들과 이별한 것으로 보인다. 
남대문 부근에서 친지들과 이별한 다산은 다시 한강 남쪽의 사평(沙坪), 곧 지금의 신사동 부근에서 아내와 자녀들을 만나고, 이곳에서 이별한다. 이 때의 시가 <사평에서의 이별[沙坪別]>이다. 

明星出東方(명성출동방) 동쪽 하늘에 샛별[금성]이 뜨니
僕夫喧相呼(복부훤상호) 노복들이 서로를 부르느라 떠들썩하다山風吹小雨(산풍취소우) 산바람이 가랑비를 내려似欲相踟躕(사욕상지주) 머뭇머뭇 가지 말라는 듯하다踟躕復何益(지주부하익) 머뭇거린들 무슨 소용 있겠나

此別終難無(차별종난무) 이 이별 끝내 어쩔 수 없는 것을
拂衣前就道(불의전취도) 옷자락 떨치고 앞서 길을 떠나
杳杳川原踰(묘묘천원유) 아득히 내를 건너고 들을 넘었다
顔色雖壯厲(안색수장려) 겉으론 비록 씩씩한 척 해도
中心寧獨殊(중심녕독수) 마음이야 어찌 나라고 다르겠나
仰天視征鳥(앙천시정조) 고개 들어 하늘 나는 새를 보니
頡頏飛與俱(힐항비여구) 오르락 내리락 함께 날고 있고
牛鳴顧其犢(우명고기독) 어미 소는 음매하며 송아지 돌아보고
鷄구呼其雛(계구호기추) 닭도 구구구 제 새끼 부르누나

해가 뜨기 전이다. 바람은 스산하게 불고 가랑비 또한 내린다. 그런 가운데 유배지로 떠나기 위한 준비에 주변이 부산하다.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의연함을 가장하며 겨우겨우 발걸음을 돌려 유배의 길에 오른다. 시에서 “겉으론 비록 씩씩한 체 해도 마음이야 어찌 나라고 다르겠나”에서 다산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다산의 유배는 이 때가 처음이 아니다. 다산의 나이 29세(1790, 정조 15) 3월 8일에 ‘해미현(海美縣)으로 정배(定配)되었다가 19일에 해배(解配)’되었었다. 하지만 이번의 유배길은 이전과 다른 상황이다. 자신을 지켜줄 줄 정조(正祖)라는 보호막이 없다. 
하늘을 본다. 나는 새도 쌍쌍이 짝을 지어 나는구나. 밭을 가는 소도, 닭도 모두 자신의 새끼와 함께 있는데, 자신은 처자식을 두고 떠나야 한다. 이렇게 아득히 들을 건너고 내를 건넜다.  
가족과 이별한 다산은 곧장 장기로 향하지 않고 충주의 하담을 들른다. 이곳에는 부모님의 묘소가 있다. 
『다산시문집』을 보면 하담에서 지은 시가 여러 편이 보인다. 이곳에서의 시는 모두 슬픔을 안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부모님의 묘소를 찾은 다산의 심정이 즐거울 수 없지 않겠는가. <하담에서 묵으며[宿河潭]>, <하담에 당도하여[到河潭]>, <하담에서 이별하며[離河潭]>, <하담에서 이별하며[河潭別]> 등의 시들이 전하는데, 그중 <하담에서 이별하며[河潭別]>라는 시가 장기를 유배 오는 도중 부모님의 묘소를 참배하고 참담한 마음을 그린 시이다. 

父兮知不知(부혜지불지) 아버님은 아시는지요, 모르시는지요 母兮知不知(모혜지불지) 어머님은 아시는가요, 모르시는가요家門欻傾覆(가문훌경복) 우리 가문이 급격히 무너져 死生今如斯(사생금여사) 이제 죽느냐 사느냐의 지경이 되었습니다 

殘喘雖得保(잔천수득보) 저는 비록 목숨이라도 지켰지만 
大質嗟已虧(대질차이휴) 큰 꿈은 아, 이미 이지러져 버렸습니다. 
兒生父母悅(아생부모열) 저를 낳고 기뻐하시며
育鞠勤携持(육국근휴지) 돌보아 기르시며 근심하시며 이끌어 지켜주셨는데
謂當報天顯(위당보천현) 하늘같은 그 은혜 꼭 갚으려 했는데 
豈意招芟夷(기의초삼이) 어찌 이렇게 꺾일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幾令世間人(기령세간인) 바라건대, 세상 사람들이여 
不復賀生兒(불부하생아) 다시는 나의 태어남을 축하하지 마세요 

친지들과 헤어지고, 아내와 자식들과도 이별한 다산은 아버지 정재원(丁載遠, 1730~1792)과 어머니 해남 윤씨(1728~1770)의 묘소에 와서는 통곡한다. 자신을 낳고 큰 재목으로 성장하길 바랐던 부모님, 그런 부모님 앞에 자신의 꿈과 희망이 좌절된 후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던 듯하다. 비록 자신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이렇게 살아 있으나, 형님인 정약종은 이미 명(命)을 달리하였으니, 부모님을 마주한 그 슬픔이 오죽했겠는가.
가족들과 친지들과의 이별에서도 의연함을 가장하며 누르고 누르면서 참고 참았던 울음이, 슬픔이, 한(恨)이, 죄스러움이 부모님의 묘소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아버지는 알고 계시는지요, 모르시는지요. 어머니께서도 알고 계시는지요. 모르고 계시는지요.”라는 물음과, “세상 사람들이여, 나의 태어남을 축하하지 마세요.”라는 토로는 울음 보다 더한 오열과 다름 아니다.   

내 인생 그르친 것 책인 줄 알지만, 이웃집 아이 책 읽는 소리를 누워서 듣고 있구나

이런 슬픔 속에서 다산은 장기에 도착하였다. 때는 3월 9일이다. 유배가 정해진 지 열흘만이다. 다산에게 장기는 그리 낯선 곳은 아니다. 이전에 부친인 진주공의 임지인 울산을 다녀가며 경주와 영천 등 주변을 두루 다녔던 다산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다산의 슬픔은 더하였을 듯하다. 부친과 함께 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리라. 
장기에 온 후 지은 <홀로앉아서[獨坐二首]>의 두 번째 시에도 다산의 슬픔이 그대로 묻어난다. 

裊娜煙絲寂歷中(뇨나연사적력중) 적막한 중에도 버들가지 하늘 하늘거리는데 
春眠起後野濛濛(춘면기후야몽몽) 봄잠에서 깨어 보니 들판이 어둑하구나  
 山雲遠出强如月(산운원출강여월) 산 구름 저 멀리부터 걷히는데 달이 뜬 듯 훤하고 
林葉自搖非有風(림엽자요비유풍) 숲의 나뭇잎은 바람이 없는데 절로 흔들리누나 
眼向綠陰芳草注(안향록음방초주) 눈은 녹음방초를 찾아가지만
心將槁木死灰同(심장고목사회동) 마음은 마른나무나 식은 재와 같으니
縱然放我還家去(종연방아환가거) 설사 나를 놓아주어 집으로 돌아가도록 한다고 해도
只作如斯一老翁(지작여사일로옹) 기껏해야 한 늙은 노인일 뿐이구나

봄은 새로움의 시작이다. 추위로부터, 음지로부터 벗어남이다. 봄은 생명성을 지니고 있기에 구원의 도라고 하고, 우리들을 지탱해 줄 진리이고, 삶의 철학이자, 이상향이라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버들가지 하늘거리고, 산 구름 환히 개이고, 녹음방초(綠陰芳草)가 흐드러진 들판에 봄은 왔는데, 다산의 마음은 마른나무와 같고 식어버린 재와 같다. 
봄이 왔지만 봄 같지가 않은, 희망이 사라져 버려 삶을 지탱해 줄 그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마음으로부터 이미 늙음이 다가와 버린 불혹(40세)의 다산이 장기에 덩그런히 남아 있음을 시를 통해 확인한다. 
하지만 <기성잡시(鬐城雜詩)>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식어버린 재와 같던, 말라버린 나무와 같던 마음이 아이의 책 읽는 소리에 즉각적으로 반응을 하는 모습을 만난다.  

書卷深知誤此生(서권심지오차생) 이 인생 그르친 것 책인 줄을 잘 알기에
餘生逝與割恩情(여생서여할은정) 남은 인생 동안 고마운 정 끊으렸더니
心根苦未消磨盡(심근고미소마진) 아직도 마음속엔 그 뿌리가 남아 있어  
臥聽隣兒讀史聲(와청린아독사성) 이웃 아이 책 읽는 소리 누워서 듣노라네 

<독좌(獨坐)>에서 ‘후회되는 것은 쓸데없이 소동파(蘇東坡)를 배운 것’이라던 다산이, 이 시에서도 ‘자신의 인생을 그르친 것이 책이라고 하면서, 남은 인생 책을 끊어버리겠노라’고 다짐을 한다. 하지만, 가만히 누워있는 다산의 귀에 들리는 이웃집 아이의 책 읽는 소리, 그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다산의 모습을 발견한다. 
다산 자신의 말처럼 다산을 좌절하게하고, 슬프게 하고, 이별하게 한 원인은 책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 학문적으로 너무나 큰 산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유배지인 장기에서 자신을 지탱해줄 것이 책이었음을 다산 자신이 깨닫는다. 책은 다산을 좌절하게도 슬프게도 하였지만, 책이 무너질대로 무너져버린 다산을 지탱해준 것이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년보에, “3월에 장기에 도착하여 『이아술(爾雅述)』 6권과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을 지었는데, 겨울 옥사 때 분실 되었다. 여름에 성호(星湖)가 모은 1백 마디의 속담에 운을 맞춰지은 《백언시百諺詩》가 이루어졌다“고 하였으니, 7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시(詩)와 책(冊)은 늘 다산의 손에 머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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