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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묘소를 참배하고…내 삶이 이렇게 꺾일 줄 생각이나..
오피니언

부모님 묘소를 참배하고…내 삶이 이렇게 꺾일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일간경북신문 기자 gbnews8181@naver.com 입력 2021/04/22 19:59 수정 2021.04.28 14:55
기획시리즈...양곡의 노래3
하늘은 나에게 왜 칠정(七情)을 주셨나


1801년 3월 9일에 장기에 도착한 다산은 이곳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유배와 좌절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충주의 하담(河潭), 부모님의 묘소를 참배하고 자신이 느끼는 참담함을 “(내 삶이) 이렇게 꺾일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다시는 내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지 마세요”라는 말로써 표현하면서 ‘자신의 태어남마저도 부정’하였으니 다산의 슬픔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슬픔을 안고 도착한 장기에서도 슬픔은 쉬 묻히지 않았던 듯하다. 유배 초기 봄날에 썼던 시를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둑 위에서[堤上]>라는 시다.

堤上消搖趁晩晴(제상소요진만청) 늦게 개인 길을 따라 둑 위를 거니는데
春山濃翠正怡情(춘산농취정이정) 짙푸른 봄 산이 참으로 맘에 드네  
浴鳧曳水必雙去(욕부예수필쌍거) 무자맥질 즐기는 오리 물을 끌며 쌍쌍이 가고
乳雉伏林時一鳴(유치복림시일명) 숲에 숨은 새끼 꿩들 한 번씩 때로 운다
偶値白雲成獨立(우치백운성독립) 우연히 흰구름 만나면 혼자 우두커니 서 있고
忽看芳草感浮生(홀간방초감부생) 문득 방초를 보고서 삶이 부질없음[덧없음]을 느끼네
峽中耕隱知何日(협중경은지하일) 어느 날 산골에 가 밭을 갈며 지낼 수 있을까
衰髮今朝已數莖(쇠발금조이수경) 쇠한 흰머리 오늘 아침에 이미 여러 개인걸


비 온 뒤 초록의 푸르름 가득한 장기천의 둑길엔 꽃들이 붉음과 흰빛을 다투어 드러내고, 초가집 사이로 구름이 내려오고, 버들개지가 바람의 흔들림을 타고 다가오는 4월의 아름다운 봄날이다. 하지만 다산의 마음은 여전히 무겁다. 새싹을 보고도 생명의 환희를 떠올리기보다 ‘왜 태어났는지’를 묻는 다산이기에, 봄날의 풍경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가로이 무자맥질을 즐기는 오리를 보면서도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고, 내리는 비를 피해 숲에 은신한 새끼 꿩을 보면서도 가족과 떨어져서 장기에 머무르고 있는 자신이 한스럽다. 무엇보다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없는 오늘에 속울음이 울컥 일어나는 아침이다. 
흰 구름으로 시선을 돌렸는데도 외로움이 다가온다. 우두커니 서서 구름을 마주하다 다시 시선을 돌려 비 맞아 파릇파릇 돋아난 풀을 본다. ‘一切唯心造(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라 하더니, 좌절과 절망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다산에겐 비 온 뒤의 싱그러움도, 물빛에 비친 하늘 구름의 맑음도 모두가 부질없다.  

<시름[愁]>이라는 시를 보자.  

 
山葛靑靑棗葉生(산갈청청조엽생) 칡덩굴 푸름 더하고 대추나무엔 잎 돋아나는데
長鬐城外卽裨瀛(장기성외즉비영) 장기성 밖으론 바다 일렁이네    
愁將石壓猶還起(수장석압유환기) 근심은 바위로 누르고 눌러도 오히려 다시 일어나고  
夢似煙迷每不明(몽사연미매불명) 꿈은 자욱한 안개처럼 언제나 희미하네   
晩食强加非口悅(만식강가비구열) 늦게 억지로 밥을 먹어보지만 맛도 모르겠으니
春衣若到可身輕(춘의약도가신경) 봄옷 도착할 즈음이면 몸이 가벼워지려나
極知想念都無賴(극지상념도무뢰) 생각하는 것 분명 부질없음을 아는데도
良苦皇天賦七情(량고황천부칠정) 아, 괴롭구나. 하늘이 칠정(七情)을 주심이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다산은 장기성에 올랐다. 산성의 둘레엔 봄이 깊어가면서 줄기를 뻗어 푸른 잎을 키우는 칡덩굴이 자라기를 계속하고, 대추나무에는 꽃이 지고 그 자리에 새잎을 돋아났다. 그리고 저 멀리 바라다보이는 신창리 앞바다엔 물결의 푸르름이 한층 더해가고 있다. 자연은 이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때를 맞춰가며 스스로를 가꾸고 지켜가고 있다. 이것이 천리(天理)인 것을. 
하지만 다산 자신은 어떤가? “근심은 바위로 누르려고 해도 오히려 다시 일어나고 꿈은 자욱한 안개처럼 매번 희미하다.” 유배라는 현실 속에서 희망이라는 꿈은 더욱 희미해져 간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 몸이 좀 가벼워지길 고대할 뿐이다. 하지만 ‘생각’ 때문에 괴롭다. 근심을 누르려는 생각,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생각, 정조의 그늘 속에서 맘껏 자신의 꿈을 발현하던 행복한 시절에 대한 생각,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생각, 꿈에서 깨면 꿈 속 세상이 허망한 것처럼 ‘생각’이 자신을 괴롭힌다. 생각 때문에 괴롭고 또 괴롭다. 그래서 다산은 하늘을 원망한다. ‘나에게 왜 칠정(七情)을 주셨나요’. ‘생각’이 없으면 이렇게 괴롭진 않을텐데.
다산의 좌절은 어쩌면 정조의 부재[붕어]에서 온다고 하겠다. 정조의 부재는 자신의 학문과 꿈을 펼칠 기회가 없어졌다는 것이며, 자신을 알아주었던 종자기의 죽음을 의미한다. 
1822년(순조22) 다산의 나이 61세, 곧 회갑이 되던 해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쓴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광중본)의 글을 보자. 
“내가 포의(布衣)로 임금의 은혜를 입어, 정종대왕(正宗大王)의 총애와 칭찬이 같은 반열에서도 특별하였다. 전후(前後)로 상으로 하사받은 책과 말, 호피가죽, 그리고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 등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다. 나라의 기밀(機密)과 같은 사안에도 참여하여 내 생각을 글로 조목조목 적어 말하도록 하고, 이를 모두 그 자리에서 들어주셨다. 항상 규장각(奎章閣)ㆍ홍문관(弘文館)에 있으면서 서적을 교정(校正)하였는데, 직무의 일로 독려하고 꾸짖지 않았다. 밤마다 맛 좋은 음식을 내려 배불리 먹게 하였다. 더불어 내부(內府)의 남모르게 감추어 두었던 귀한 서적을 각감(閣監)을 통하여 보기를 청하면 허락해 주었으니, 모두 특별하고 남다른 예우였다.”


이글은 『다산시문집』 권16에 실려 있다. 이글에서 다산이 회고한 자신에 대한 정조의 마음씀은 언제나 ‘특별함’이었다. 다산과 정조의 각별함이 이와 같았으니, 유배의 슬픔보다 정조를 잃은 슬픔이 다산을 좌절하게 한 근원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다음의 <유천진암기[游天眞菴記]>(『다산시문집』 권14)의 글을 보자. 이 글은 장기로 유배 오기 2년 전인 1797년(丁巳, 정조 21)에 석류나무가 꽃을 피우고, 보슬비가 내리다 개던 어느 날의 다산을 만날 수 있다. 


“정사년(1797, 정조 21) 여름에 내가 명례방(明禮坊)에 있는데, 석류(石榴)가 처음 꽃을 피우고 보슬비가 막 개였다. 나는 초천(苕川)에서 물고기를 잡기에 가장 알맞은 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도적으로 대부(大夫)는 허가를 얻지 않고는 도성문[都門]을 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고해도 허락을 얻지 못할 것이기에, 곧장 초천으로 갔다. 이틀째 되는 날 강에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았다. 크고 작은 물고기가 모두 50여 마리나 되었다. (…) 얼마 후 나는 말하기를, “(…)물고기는 나도 이미 맛을 보았으니, 지금 산나물[山菜]이 한창 향기로울 것이니, 천진암(天眞菴)으로 놀러 감이 어떻습니까?” 하였다. 이에 우리 형제 네 사람과 일가 서너 사람이 함께 천진암에 갔다. 
산으로 들어가자 초목은 이미 울창하였고, 산 중의 온갖 꽃들이 섞여 만발하여, 꽃 향기가 코를 찔렀고, 온갖 새들이 화답하며 울어대는데, 울음소리가 맑고 아름다웠다.
가다가 듣다가 하면서 서로 돌아보며 매우 즐거워하였다. 천진암에 이르러 술 한잔에 시 한 수를 읊으며 날을 보냈다. 삼 일을 있다가 돌아왔는데, 시 20여 수를 지었다. 먹은 산나물도 냉이ㆍ고사리ㆍ두릅 등 모두 56종이었다”
명례방(지금의 명동 주변)에 있을 때의 일이라 한다.(명례방과 천진암은 다산의 시문에 여러 번 등장하며 다산에게 매우 의미 있는 곳이다.) 여름으로 접어들 무렵, 보슬비가 내리다 그쳤다. 다산은 문득 고향인 초천(苕川)의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자 다산은 공무를 뒤로하고 곧장 고향의 냇가로 향한다. 그러고는 약종과 약전 등 4형제가 함께 이곳에서 물고기를 잡고 놀았다. 그런 후 천진암으로 가서, 그곳에서 산나물에 술 한 잔을 마시며 함께 시를 짓고 놀았다는 이야기다. 
자유로우면서도 낭만적이고, 천진난만하면서도 감성적인,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눈치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은 해야 하는 다산이다. 


"나의 병[약점]을 나는 스스로 알고 있다. 용기는 있으나 지모(智謀)가 없고, 선을 좋아하지만 가려서 선택할 줄을 모르고, 감정에 따라 곧장 행동하면서, 의심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데 참으로 마음에 내킴이 있으면 그만두지를 못하고, 하고 싶지 않지만 마음에 거리낌이 있어 개운치 않으면 반드시 그만두지를 못한다.(중략) 안타깝도다. 이 두 마디[與ㆍ猶]의 말이 내 병[약점]을 치유해 줄 약이 아니겠는가.”


<여유당기(與猶堂記)>(다산시문집 권13)의 글이다. 1800년(정조24) 봄에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내려와서, 자신이 머무는 집을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이름 지으면서 쓴 글이다.  
다산은 ‘여(與)’와 ‘유(猶)’를 자신을 치료할 ‘약(藥)’이라고 하였다. “겨울에 내[川]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與兮若冬涉川],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듯 두려워하라[猶兮若畏四隣]”는 『노자』 15장의 글. 이글을 당호로 삼으면서 다산은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 들어와 뼈를 깎는 듯 할 터이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그것은 ‘신중하고 또 조심하자’이다.
다산은 “6, 7년 전에 ‘여유’를 당호로 쓰고 싶었지만, 실행하지 못하고 지금에 와서야 쓴다.”고 했다. 정조의 부재를 예견하고 스스로에게 닥칠 어려움을 예감했다는 말인가? 그래서 자신을 지켜주고 치료해줄 약으로 여유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늘 경계하려고 한 것일까? 분명한 것은 경신년(1800, 정조 24) 봄에 다산은 시기하는 자가 많음을 알고 자신을 향한 칼날을 피하려고 처자를 거느리고 마현(馬峴)의 옛 마을로 돌아갔고, 그 해(1800년) 6월 24일에 정조가 붕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1801년 3월 9일부터) 장기의 마현(馬峴)마을에 유배와 있다.


奕棋曾不解贏輸(혁기증불해영수) 바둑과 장기의 승부수를 일찍이 알지 못하기에
局外旁觀坐似愚(국외방관좌사우) 곁에서 물끄러미 바보처럼 앉아 보다가
好把一條如意鐵(호파일조여의철) 한 자루 철여의를 쥐고서砉
然揮掃作虛無(획연휘소작허무) 단번에 판 위를 확 쓸어 없애 버리면
不亦快哉(불역쾌재) 그 얼마나 통쾌할까(20수 중 13번째 시)


1796년 겨울 새해를 맞을 즈음 쓴 <불역쾌재행(不亦快哉行)>의 시구(詩句)처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철여의(鐵如意)’를 들고 바둑판을 확 쓸어 버릴 수만 있다면, 그래서 지금의 상황을 뒤집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불역쾌재행>의 마지막 시, “낯선 타향의 적소에서 도성의 궁궐을 그리다, 여관에서 잠 못 들며 홀로 등불 밝히는데, 홀연히 죄를 사면한다는 반가운 소식 듣고, 집에서 보낸 편지 직접 뜯는다면 그 또한 얼마나 흔쾌하겠는가.”처럼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면, 그 또한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이래저래 장기에서의 봄이 지나간다.

* 참고자료: 국역 『다산시문집』(민족문화추진회 편, 솔,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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