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국학진흥원은 ‘가정의 달 특집-같이의 가치, 조선판 대가족’이라는 주제로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담談 5월호를 발행했다고 8일 밝혔다.
조선시대에도 혈연 외 다양하게 구성되는 가족 등 여러 공동체가 있었다.
이들 공동체의 실질적인 질서 유지법은 향약, 계, 두레였다.
한국국학진흥원의 웹진 담 5월호에서 이광우 박사는 ‘조선의 모둠살이, 향약·계·두레 이야기’라는 코너를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이 같이 살아가던 방식인 향약·계·두레의 유래부터 시대의 변화에 따른 발전 양상까지 자세히 풀어냈다.
성리학을 익힌 조선의 양반들은 성리학의 자치규약인 향약을 유향소를 중심으로 향촌에서 시행하며 학문을 실천하고자 했다.
조선 후기에는 수령권이 강화되자 지방관들도 향약을 적극적으로 시행하면서 관치행정의 보조수단으로 활용되며 관에 의해 조직의 권위를 보장받았다.
계는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를 유지하는 ‘동계(洞契)’, 하층민과 노비들이 운영하며 실질적인 촌락의 이익을 위해 운영된 ‘촌계(村契)’가 있었다.
동계는 향약과 접목돼 ‘동약’이라고 불리며 성리학적 명분을 부여했다.
향약의 4대 강령 중 ‘과실상규(過失相規)’는 하층민을 직접 규제, ‘예속상교(禮俗相交)’는 양반·서얼·상민·노비 등 신분 간 질서 확인, ‘환난상휼(患難相恤)’은 촌락 조직의 공유 재산을 양반이 주도할 수 있는 근거였다.
촌계는 촌락의 부세(賦稅) 행정을 주도해 세액 배정이나 공동납, 부세 감면 등을 이끌었다.
어촌의 경우 촌계가 어장 및 어구를 관리했는데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두레는 촌락민의 생업과 관련된 공동노동 조직으로 유래는 명확하지 않지만 조선 후기 이앙법(移秧法)이 보급되면서 일반화됐다.
모내기처럼 짧은 시간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할 때 두레가 활용됐다.
촌계에 의해 관리되기도 하고, 양반이 주도하는 상계의 통제를 받기도 했다.
송석현 작가는 ‘존애원,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 마음을 둔다’라는 글을 통해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지역 상황과 약이 부족해 비명에 죽는 백성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낙사계’ 구성원들이 설립한 ‘존애원’에 대해 살펴본다.
조선 최초 사설 의료기관이라 할 수 있는 존애원은 1599년(선조 32) 정경세(鄭經世)가 주도해 창건했다.
민관이 함께 복구에 힘쓰던 임진왜란 직후 경북 상주는 큰 타격을 받은 도시 중 하나였다.
전쟁 중 많은 인원이 죽게 되면서 여러 계를 합쳐 하나의 지역공동체인 낙사계(洛社契)를 형성했다.
낙사계는 전쟁 후 약이 부족해 비명에 죽는 백성들을 두고 볼 수 없어 존애원(存愛院)을 설립하게 된다.
정경세의 절친 이준(李埈)이 쓴 ‘존애원기’는 존애원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남겨져 있다.
존애원이란 이름은 송나라 정호(程顥)의 ‘남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둔다(存心愛物)’라는 말에서 따왔다.
의국의 역할뿐만 아니라 강학·경로연·백일장·만남의 장소 등 지역공동체의 다양한 활동에서 활용됐다.
그들의 심정을 남긴 글에서 ‘다른 사람과 나를 하나로 생각’,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라고 했고, 그 다른 사람을 ‘동포(同胞)’라 지칭했다.
혈연적 의미가 내포된 동포라는 표현에서 지역공동체를 확장된 가족의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1797년(정조 21) 정조는 존애원에 대해 전해 듣고 낙사계에 자신도 참여하고 싶다고 칭찬하며 그 설립의 뜻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낙사계는 존애원을 통한 의료 활동으로 그 공동체 본래의 목적을 넘어 주변 사회에 관심을 두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공동체로 확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권숯돌 작가의 ‘이달의 일기–우리가 빛날 때'에서는 선조들이 동회나 계모임에서 회칙을 만들고 이를 지키며 서로 돕고 도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번 호 웹진 편집장을 맡은 조경란 박사는 “5월은 가족을 위해 챙겨야 할 날들, 꼭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날들이 많다”며 “이번 달 만큼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돌아봐야 할 아이들과 어르신들, 이웃들을 생각하자”고 말했다.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