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예술의 남상(濫觴)은 신라천년에서부터 발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주시 ‘월성의 와궁 터’는 우리문화의 정수(精髓)이다. 이 같은 유적지 발굴에서 수많은 유물이 나와, 그 시대상을 짚어볼 수가 있게 되었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 사업에서 지난해 3월부터 시행한 경주 월성(사적 제16호) 정밀발굴조사 결과, 하나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일곽의 통일신라 후기 건물지군으로 확인되었다. 이번에 건물지군이 확인된 곳은 월성의 중앙지역인 C지구이다. 앞서 진행된 시굴조사(2014.12월~2015.3월) 결과를 토대로 지난해 3월부터 1년간 정밀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정밀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일곽의 건물지군은 동서 51m, 남북 50.7m의 정사각형 모양이다. 담장을 둘러친 일곽 안팎에 총 14기의 건물이 배치된 형태로 나타났다.
건물과 담장의 건축 시기는 인화문(도장무늬) 토기, 국화형 연화문 수막새 등 관련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8세기 중반 이후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담장 안팎에 길이 36m(정면 16칸, 측면 2칸) 규모의 대형 건물 등 6동의 건물을 배치했다. 이후 내부 공간 확보를 위해 좌우 경계인 동·서쪽 담장을 허물고, 건물 8동을 증축했다. 모두 14동의 건물을 갖추어, 왕궁 내 시설을 완성해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에 공개한 유물 외에 ‘정도(井桃)’, ‘전인(典人)’, ‘본(本)’, ‘동궁(東宮)’ 등이 새겨진 기와와 토기가 새롭게 출토되었다. ‘전인(典人)’은 궁궐 부속관청인 와기전(기와·그릇 생산 담당)에 소속된 실무자, ‘본(本)’은 신라 정치체제인 6부 중 하나인 ‘본피부’, ‘동궁’은 태자가 거처하는 궁궐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확보된 유물 분석 자료에 따르면, 월성은 주로 4세기에서 9세기까지 왕궁 또는 관련 시설이다. 신라 이후 근대 이전까지는 월성 내에 거의 사람이 거주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월성 왕궁 터의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난 셈이다. 이제부터 이를 어떻게 보존하고 고고학적인 연구가 있어야만 한다. 우리 문화의 발원지에 대한 연구이다. 당대의 문화를 연구하는 것은 신라문화가 밑동이다. 밑동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것은 우리의 책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