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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경북신문

자극만 있고 이야기 없는, 허망하고 공허한 누아르..
사회

자극만 있고 이야기 없는, 허망하고 공허한 누아르

운영자 기자 입력 2014/06/12 20:24 수정 2014.06.12 20:24
영화 리뷰: 황제를 위하여
▲     © 운영자
프로야구선수‘이환’(이민기)은 승부 조작에 가담했다가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환은 우연히 만난 대부업체 사장‘정상하’(박성웅)의 눈에 띄어 그의 조직에 들어가게 되고, 실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한다.
상하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이환은 점점 야망을 드러내고, 상하의 다른 부하들은 그런 이환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게 전부다. 물론 영화‘황제를 위하여’(감독 박상준)의 줄거리를 위에 적은 것보다 더 길게 적을 수는 있다. 스포일러가 될 만한 몇 가지 이야기를 더하면 된다. 하지만 주변의 누군가가 이 영화의 이야기에 대해 더‘구체적으로’써달라고 요구한다면, 만족시킬 자신이 없다. 영화를 비꼬는 게 아니다.‘황제를 위하여’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저게 전부다.
영화가 친절해야 할 이유는 없다.
한 번 보고도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영화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영화도 있는 법이다. 영화는 공익용 표어가 아니다. 하지만 불친절하게 설명하는 것과 아예 설명을 하지 않는 건 엄연히 다르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은 친절한지 불친절한지 알 수 없고,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 없다. 단지 말이 없는 사람이다.‘황제를 위하여’는 말을 하지 않는 영화다.
이야기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처럼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특정한‘성격’이 특정한‘상황’에 던져졌을 때 어떤 특정한‘선택’을 하는지를 지켜보는 작업”이다.‘황제를 위하여’의 주인공은 이환이다. 정상하는 이환에 종속돼 있다. 스스로 선택해서 행동을 하는 인물이 아니다. 이환이 움직이면, 정상하는 반응한다.‘황제를 위하여’는 이환의 영화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특정 성격을 가진 이환을 특정 상황에 처하게 해서 어떤 특정 선택을 하는지 지켜보는 일이다.
‘황제를 위하여’는 성격도, 상황도, 선택도 없이 104분을 허비한다.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이환은 욕망에 불타는 성격이다. 범죄 조직에 들어가는 상황에 처했다. 조직의 가장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이유가 없다. 이환은‘왜’욕구 불만에 빠져있는가. 조직에서‘왜’도태될 상황에 처하는가(조직에 들어갔다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왜’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려하고,‘왜’배신하는가.
극이 심화하는 중요한 사건은 이환과 술집 마담‘연수’(이태임)와의 관계, 이환이 그간 공들여온 불법 스포츠 도박사이트 사업에서 물러나게 되는 일이다. 연수는 술집 여자이기 때문에 이환이 속한 조직의 뒤를 봐주는 한 회장을 접대해야 한다. 이 일로 이환은 분노한다. 하지만 이환은 분노만 하고 그친다.
도박 사이트 건도 마찬가지다. 이환은 이 사업에서 손을 떼게 되자 분노하지만 또 분노만 한다.
두 사건 모두 어떤 일이 당장에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지만, 그걸로 끝이다. 연수는 갑자기 영화에서 사라진다. 이환은 상하가 자신을 동정했다는 이유로 그를 너무도 쉽게 배신한다. 상하가 이환을 동정했다는 내용 또한 제대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이유가 없는 행동을 나열하는 것은 서사가 아니다.
상하의 적인 작두는 왜 갑자기 나타난 것이며, 감옥에서 나온 상하는 왜 갑자기 자신을 배신한 이환을 도와주는 것일까. 이환의 친구는 왜 갑자기 등장하고, 자살할까. 아무리 장르화 된 세계 안에서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라고 이해해도 겉멋이 잔뜩 들어간 대사와 장면은 참아내기 힘들다. 모텔 격투신과 이환과 연수의 섹스신은 단순히 관객을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면일 뿐이다. 그리고 그 둘을 섞은 이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는 어떤 의미도 찾기 힘들다.
모텔 격투신은 랜턴을 조명삼아 멋지게 찍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영화상에서 두 번 반복되지만, 여기에는 어떤 미학적 비전도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랜턴이 쉬지 않고 흔들리는 모습이 인위적으로 비춰질 뿐이다.
이환과 연수의 섹스신은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나쁘다. 이환의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길게, 그렇게 노골적으로 표현할 이유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여배우를 배우가 아닌‘몸’으로만 활용하는 것처럼 보여 불쾌하다.‘황제를 위하여’에 대한 이야기는 온통 이태임의 노출 연기에 맞춰져 있을 뿐이다.
박성웅은 생기 없는 연기를 한다. 이민기는 시종일관 눈을 부릅뜨고 있지만 카리스마를 느낄 수 없다. 이는 연기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연출의 문제로 보인다.
‘황제를 위하여’는 공허한 누아르 영화다. 자극만 있고, 이야기는 없는 허망한 영화다.
 이 영화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 한국 장르영화의 트렌드는 극장을 나오면 무엇을 봤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장르 영화를 만든다고 해도 최소한의 서사는 갖춰야 한다.
김지운의‘달콤한 인생’(2005)을 이을 한국형 누아르 영화는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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