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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경북신문

봉쇄된 도시서 700일 어떻게…..
사회

봉쇄된 도시서 700일 어떻게…

운영자 기자 입력 2014/06/12 20:57 수정 2014.06.12 20:57
독안에 든 쥐처럼 생활
 ▲ 시리아 내전 4년째가 되는 내전에 도망가지도 못하고 외부와 격리된 채 전쟁을 견뎌낸 사람들은 실제 어떻게 살아왔을까.     © 운영자
내전으로 시리아 인구 2300만 명 중 300만 명 정도는 이웃 나라로 탈주했고 이의 배 정도는 집을 버리고 국내 다른 곳으로 피난갔다. 16만 명 넘게 죽은, 4년째가 되는 내전에 도망가지도 못하고 외부와 격리된 채 전쟁을 견뎌낸 사람들은 실제 어떻게 살아왔을까.
700일의 봉쇄 기간 중 그녀의 세계는 거실과 부엌으로 쫄아들었다. 그녀는 풀을 먹고 책을 읽으면서 살아 남았다. 그녀는 거울을 들여다 보는 걸 거부했다. 거울에서 말라빠져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그나마 남았던 기운이 사그리 사라질 것 같았다.
제이나트 아크라스는 65세의 약사, 집에 2년 동안 꼼짝없이 갇힌 태가 완연히 드러난다. 정부군은 도시를, 반군은 그녀의 집을 둘러싸고 있던 2년이었다. 중부 도시 홈스의 구시가지였다. 그녀의 몸무게는는 38 ㎏. 이도 지난 5월 초 봉쇄가 종료된 후 4 ㎏가 늘어난 것이다. 한 달 전 그때 반군들은 홈스 시를 완전히 내주고 떠났다.
"날마다, 우리는 내일이면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고 아크라스는 집에서 가진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회상했다. "만약 우리가 날짜를 헤아렸다면, 우리는 포기해 버렸을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 홈스의 고읍 지구는 반군들을 독안에 든 쥐처럼 몰사시키려는 정부군의 포위와 간단없는 폭격에 시달렸다. 홈스는 2011년 3월 아사드 대통령 정권에 반기를 든 최초의 혁명 도시 중의 하나였다. 도시는 정부군이 진압대를 보내고 반군이 무장하면서 곧 전장터가 됐다.
정부군은 2012년 초에 홈스 시 중 반군이 장악한 지역을 물샐 틈 없이 차단해 버렸다. 이 지역의 주민 수만 명은 집을 버리고 떠났다. 포위 봉쇄 작전이 계속되자 2013년 후반 반군들은 탈영하기 시작했다. 굶주림이 만연해 사기가 떨어진 것이다.
결국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수십 명의 반군들은 5월 휴전 협정을 맺고 북쪽으로 퇴각했다. 정부군이 홈스를 완전 장악했다.
아크라스와 그녀의 두 남동생은 끝까지 집을 떠나지 않은 극소수에 속했다. 집을 빼앗고 거기에 있는 약국과 양장점을 약탈할까 두려워 떠나지 못했다.
초기에는 포위 상황은 견딜 만 했다. 이들은 쌀, 콩, 밀 및 석유 등을 비축해 놓았던 것이다.
봉쇄 기간이 깊어지면서 아크라스는 건물을 거의 떠나지 않았다. 700일 동안 단 여섯 번 집 밖을 나간 것 같다고 그녀는 헤아렸다.
새벽에 일어났고 해가 지는 대로 취침했다.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 2년 동안 최소한 포탄 12발이 집을 때렸다. 윗층이 망가졌다. 밤낮으로 폭발음이 들려 정신이 산란했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2013년 이들의 약국과 옷가게가 약탈 당했다. 형제들은 남은 약품과 옷가지들을 집으로 가지고 왔다. 포위가 길어지자 반군 병사들이 틈틈이 찾아와 음식과 연료를 요구했다. 이들은 떼를 지어 와 아크라스더러 거실에 앉아 있으라고 한 뒤 부엌와 윗층 아파트를 뒤졌다. 윗층에 식량이 숨겨져 있었는데 한 젊은 병사가 거의 다 먹고 몇 숟갈 남지 않은 잼 병을 발견하고 잡아채 갔다.
이제 반군 병사들은 무기도 들 생각도 없이 그저 문을 두드리고서는 식량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2013년 중반, 무장한 반군들이 집을 포위한 뒤 들어와서는 숨겨놓았던 식량과 연료 거의 모두를 가지고 가버렸다.
삼 남매는 오직 빻은 밀 밖에 없었다. 이것도 올 1월 동이 나고 말았다. 동생 중 아나스가 암이 심해져 유엔의 시민 철수 작전 때 수백 명과 떠났는데 19일 뒤 사망했다.
이후 아크라스는 하루 하루 살아가는 데 골몰하기로 했다. 석유가 없어지자 아이만은 땔나무를 주웠다. 먹을 것이라곤 이제 차, 기름 그리고 양념류 밖에 없게 되자 아이만은 풀을 채취했다.
민들레, 치커리, 당아욱들이였다. 이제까지 그녀는 이런 것들을 풀이라고만 알지 이름 같은 것을 알 정도로 눈여겨 본 적이 없었다. 이 풀조차도 귀해 아이만은 교회 묘지에 가서 파헤쳐 구해와야 했다. 아크라스는 풀들을 담가 다듬고 끓이고 양념에 무치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봉쇄가 끝나고 정부군이 입성한 뒤에야 자신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게 됐다. 군이 들어오는 TV 뉴스에 비친 것이다. 아이들보다도 더 작은 몸이었다.
정부군이 도시에 5월9일 들어올 때 라디오 같은 것이 없어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날 밖에 나가 골목 끝에서 병사를 본 아크라스는 다짜고짜로 빵을 좀 달라고 부탁했다. 군인은 납작한 피타 빵 두 다스를 가져다 주었다.
"나는 온전한 빵 한 개를 몽땅 다 먹었다"고 아크라스는 말했다. "꿀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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