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배 KTF 해양영토전략연구소장
1998년 8월 15일, 나는 후지산(富士山) 정상에 서 있었다.
광복절이었다. 서른 남짓의 젊은 법학자가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으로 머물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내 안의 애국이란 조잡하고 치졸했다. 식민의 치욕을 갚겠다며 도쿄 신주쿠발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들의 영산(靈山)에 올라 정기라도 앗아 오겠다는 허망한 객기였다. 등산로 입구 상점에서 1,000엔을 주고 나무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고향 부산의 금정산조차 숨차하던 풋내기가 해발 3,776미터의 화산재 언덕을 밤새 걸어 오르겠다고 나선 꼴이었다. 무지했기에 사나웠다.
어둠 속의 후지산은 고단했다. 앞선 자들의 뒤꿈치와 손전등 불빛의 흔들림만을 응시하며 한 발씩 디뎠다. 8합목의 칼바람에 닿자 폐포가 찢어질 듯 조여왔다. 사지가 납덩이처럼 가라앉았다. 분노는 걸음마다 부서져 나갔다. 살아남아 발을 떼는 일만이 눈앞의 전부였다.
동틀 녘, 발아래로 운해가 아득히 깔렸다.
사방은 적막했고 바람은 차가웠다. 숨을 토해내며 문득 깨달았다. 산은 말이 없다. 후지산은 내가 어느 나라 핏줄인지 묻지 않았다. 오르는 자의 원한에도 무심했다. 흙은 흙이고 바위는 바위일 뿐이었다. 자연의 거대하고 냉담한 침묵 앞에서 내 적의(敵意)는 참으로 왜소했다. 그날 나는 빈손으로 산을 내려왔다. 정기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이기고 싶었던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내 안의 무엇이었다는 것을, 나는 내려오는 길에서야 알았다.
7년이 흘렀다.
2005년, 미국 시애틀의 한인 라디오 방송국 마이크 앞에 앉았다. 국제법상 영토 취득의 법리를 강론하다가 엉뚱한 비유를 뱉었다.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라 우겨댄다면, 국력을 키워 미국이 알래스카를 사들였듯 후지산을 통째로 사버리면 어떻겠냐는 농이었다. 감정에 기대지 말고 논리와 국력을 기르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말은 뼈를 벗어나 살을 다쳤다. 며칠 뒤 시애틀 한인사회에서 전갈이 날아왔다. "최 교수가 독도를 일본에 팔아넘기자고 선동했다는데 사실이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말이란 허공을 건너며 표정을 바꾼다. 역설이 왜곡으로 둔갑한 것이다. 그러나 그 소동은 기이한 불씨를 틔웠다. 시애틀 동포 사회에 독도 수호의 뜨거운 불길이 일었다. 마침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밀어붙이던 해였다. 그날 이후 독도는 내게 단순한 동해의 바위섬이 아니라 살과 피를 요구하는 화두가 되었다.
다시 20여 년의 세월이 물처럼 흘렀다.
2026년, 35년의 강단을 마무리하며 1998년의 그 위태롭던 청년을 돌아본다. 그 시절 후지산 정상에서 이기고 싶었던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내 가슴 밑바닥에 도사리던 식민의 콤플렉스와 남루한 분노였다. 젊음의 적의를 이기는 데 20년이 걸렸다.
독도를 지키는 일은 타자를 증오하는 일이 아니다. 스스로의 뼈대를 곧추세우는 일이다. 독도의 뼈란 그것이다. 분노가 아니라 지식이고, 아우성이 아니라 설득이며, 격정이 아니라 다음 세대의 뇌리에 심어주는 단단하고 조용한 사유다. 분노는 휘발하기 쉽고 아우성은 흩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문헌을 꿰뚫는 서늘한 지식과 국제 규범의 문맥을 짚어내는 차분한 설득은 풍화되지 않는다.
후지산 꼭대기에서 굽어보던 구름에는 국경의 금이 그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구름 아래 인간의 바다에는 영토와 주권이라는 실존의 무게가 도사리고 있다. 독도는 좁은 섬이다. 그러나 그 섬을 품는 국가의 식견과 시민의 품격마저 좁아터져서는 안 된다. 태극기를 흔들며 핏대를 세우는 격정보다, 태정관(太政官) 지령과 칙령 제41호의 행간을 조용히 짚어내는 시민 한 사람의 앎이 천 배는 더 무겁다.
1998년의 어리석던 나에게 이순(耳順)을 넘긴 오늘의 내가 말을 건넨다.
“후지산의 정기 따위를 탐내지 마라. 그런 것은 애초에 없다. 그 대신 우리 아이들의 가슴뼈 속에 지워지지 않을 독도의 역사를 똑바로 새겨 넣어라.”
적의를 거두고 지성을 채울 때, 비로소 독도는 침묵 속에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영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