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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경북신문

이용수 할머니의‘사자후’..
사회

이용수 할머니의‘사자후’

운영자 기자 입력 2015/04/27 16:34 수정 2015.04.27 16:34
▲     © 문기성  포토맥 컴퓨터 대표   백년만에 찾아 온 겨울 폭설이 지나간 대지의 초록빛 향연을 즐기면서 워싱턴을 방문 중인 이용수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은 봄의 축복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내일의 생사를 모르는 전투기 자살특공대 가미가제 일제 군인들에게 짓밟힌 순백 소녀의 순정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울분이 치솟음을 느낀다.
이용수 할머님을 처음으로 뵈는 순간 한라산의 한란처럼 곱고 선하고 순수하였다. 87살이 믿어지지 않은 육체의 나이와 시궁창 같은 일본제국의 반인륜적 범죄의 피해를, 꽃도 피어 보지도 않은 나이에 겪었지만 악마를 물리친 자비로운 연꽃 한송이를 뵌 듯이 고요하시다.
"지금까지 미국에 3번째 왔어요, 2007년 5월에는 기쁨으로 증언하러 미국에 왔어요. 역사의 정의를 세우는 미연방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7월 30일 만장일치로 통과 되었어요. 일본의 친구 미국은 일제에 의한 위안부 강제동원을 시인, 사과하고 책임을 인정하라고 일본정부에 요구했어요."
2015년 4월에 할머니는 다시 워싱턴을 찾았다. "역사의 산증인, 일제에 의한 성노예 피해자 이용수 앞에서 일본 아베총리는 이용수의 눈을 똑바로 보고 진실을 말하라." 할머니는 15살 소녀가 되어 울부짖고 있었다. 봄바람이 연꽃 숲에 불어와 꽃잎을 떨어 뜨리고 지나 간다. 이용수 소녀의 고요하면서도 애잔한 목소리 속에서도 힘찬 절규가 폭포처럼 넘치고 있었다.
"아베 총리는 역사를 부정하면서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이용수가 왜 위안부입니까. 위안부가 아닙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준 이용수이고 조선의 장한 딸입니다. 한밤 중에 일본군에게 이유도 모른 채 끌려갔고(1943년 10월) 일제가 나를 성노예로 만들었습니다. 군인 방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때리고 전기고문까지 했어요. 명이 길어서 살아남아 내 입으로 내가 당한 일제에 의한 성노예 생활 전부를 빠짐없이 진실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아베 총리는 역사의 산증인 앞에서 거짓말을 쏟아 내고 있습니다. 구천(九泉)으로 먼저 떠난 강제군위안부 피해자 소녀들을 위해서 일본의 사죄와 배상 없이는 절대로 죽을 수 없어요. 200살까지라도 살아서 꼭 일본으로부터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배상을 받아서 눈을 감아 구천에서 맴돌고 있는 원혼들을 달래주고 싶습니다."
"아베 총리가 전쟁이 있는 곳에 위안부 여성있다는 망발을 저질렀습니다. 일제 정부가 군인들을 위해서 위안소를 만들고 소녀들을 조선에서 강제로 끌고 간 것이 아닙니까. 부모님과 6남매의 행복한 가정의 15살 고명 딸에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성노예를 만들어 놓고 남의 얘기처럼 인신매매 당했다니요?"
"세상을 아무것도 모르던 제가 끌려간 곳은 일제가 점령한 대만의 신주 가미가제 공군부대입니다. 그 부대에서 21살 일본군인이 도시코(年子)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치욕의 성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어느날 부대내에서 비행기 청소일 등을 하는 대만 노무자가 담너머에서 전쟁이 끝났다고 알려주었어요. 그후 수용소를 거쳐서 1946년 집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이용수 소녀의 행방불명으로 아버지는 술로 세월을 보내서 중풍이 재발하여 먼저 돌아가시고 후에 어머니마저 병으로 돌아 가셨다. 그렇게 고명딸의 행복을 누릴 천부적 인권을 일제는 처절히 짓밟았다. 나는 도저히 이용수 할머니에게 가족사를 여쭈어 물어 볼 용기가 없어서 입을 닫았다.
아무리 연꽃향의 자비로움이 있을지라도 분노하는 마음이 없으리라. 그러나 이용수 할머니는 "이웃나라 일본과 친교를 나누기 위해서, 자라나는 한일 젊음이들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 원한과 원망을 뛰어 넘기 위해서 일본은 고개를 숙이고 공식적인 사과와 법적인 배상을 평화적으로 하여야 한다"고.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고 또랑또랑 결기어린 목소리로 힘주어 말씀하신다.
할머니는 "혼다 하원의원이 역사의 진실 앞에 반성과 사과를 하지 않은 모국의 잘못을 지적하는 연설을 경청하며 감동을 받았다"며 "아버지 같은 따스한 정을 느낀다"고 말했다. "위안부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애쓰시는 미 의원들에게 한없이 감사를 드린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힘주어 말씀하신다. "일본 국민을 살리고 일제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공식적인 사과를 바랍니다. 꼭 사과와 배상을 하십시오. 거짓말을 그만하세요. 역사의 산증인이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아베 총리가 상하원 의회 연설할 때 역사의 성노예 피해자 산증인 이용수가 똑바로 앉아서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바라 볼 것입니다. 아베총리는 역사의 산증인 앞에서 진실을 말하고 잘못을 뉘우치길 바랍니다."
이용수 할머니는 98년도 일제 위안부 아시아 연대 관계자들과 대만 신주 공군기지를 방문했다. 그때 해방을 알려준 대만 노무자와 재회를 할 수 있었다. 대만 노무자는 "이 공군기지가 그 당시 일제 가미가제 공군기지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근처 바다로 가서 성노예 피해자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남자 여자 인형 한쌍을 바다에 띄웠다. 이어 근처 산으로 가서 약식 위령제도 올렸다. 땅위에서 하늘아래에서 할머니는 살아 남은자의 비애를 처절히 느끼면서 통곡했을 것이다.
"인터뷰 할 때마다 과거의 성노예 고통이 동반되어 몰려 오면서 잠을 잘 못자요. 전기고문 후유증도 남아 있고 환청, 환상이 있어 마음이 아프고 힘들어요."
망각되지 않은 성노예 피해자는 구순을 바라보고 있지만 일제의 반인륜 범죄에 빼앗긴 15살 소녀의 영혼은 송두리째 뽑혀져 허공과 바다에 부유(浮遊)하고 있다. 오직 일제의 정부를 계승한 일본 정부의 진정어린 사죄와 배상이 있어야 구천에서 맴돌고 있는 성노예 피해자들의 원혼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이 나이에 무슨 삶에 애착이 있겠냐마는 일본의 사과와 배상이 없이는 눈을 감을 수 없다고 하신다.
이용수 할머니는 창밖 나목의 숲에 펼쳐지는 초록빛 새순에 자주 눈길을 주었다. 15살 꿈많은 소녀가 되어 첫사랑 봄바람을 맞을 준비를 했던 그 오래전 퇴화된 기억을 끄집어 눈물을 짓고 있는지 모른다. 인터뷰 내내 할머니는 사과와 배상받지 못하고 일제에 의하여 갈갈이 찢어진 마음의 강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제와 일본에 대한 원망과 원한을 다음세대의 초록빛 새싹을 키우는 거름으로 쓰고 싶은 할머니의 간절한 피눈물의 소망을 보았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인 동시에 반인륜적 전쟁 범죄에 희생된 피해자들의 외침이 마른 하늘에 비가 되어 봄날에 삼라만상을 키우고 있다.
그러면서 덧붙이신다. “어느날 마후라로 얼굴을 가린 한 여인이 우리 집에 와서 나를 찾더니 죽기전에 고백할것이 있다고 해요." "내가 너 끌려 갈 때 너희 집에 일본 군인하고 같이 왔던 여자’라고 ‘꼭 이 말을 해야 내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아서 왔다’고. "맨살 얼굴을 보여준 여인이 강제 위안부 생활에서 얻은 성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고 했다. "그때 같은 동네에서 5명이 끌려가 1명은 죽고 4명만 천신만고 끝에 돌아 왔다"고 하면서 할머니는 잊고 싶었던 그때의 기억을 또다시 되살려 말한다.
"아베 규탄 대회를 준비하고 따뜻하게 우리들을 항상 맞이 해주시는 동포들에게 너무나도 뼈저리게 고맙고 피 눈물 보다도 진한 혈육의 정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태어나도 어찌 이 은혜를 다 갚지 못할겁니다. 눈 감을 때까지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용수 할머니를 소개할 때 동석한 관계자에게 '이용수 어머니'라고 호칭 해 줄 것을 부탁 드렸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치유될 수 없는 기억이 가슴 밑바닥에 침잠(沈潛)한 그분을 어머니라고 불러 드리고 싶었다. 대화 내내 꿋꿋한 모습으로 인터뷰를 해주신 이용수 어머니가 무병장수하시길 빌고 또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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