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房 玘 泰 편집국장 우리는 말하기 전에 언어구조로 사유(思惟)한다. 행동도 사유한 다음에야 가능하다. 그러니 말(언어)로써 사유하고 행동한다. 말·언어의 구조에 따라서 우리는 일상생활을 영위한다. 말과 행동 앞·뒤에 사유·행동이 있다. 그러나 말과 언어는 은유(隱喩)이다. 은유로 나타낸 현실은 진짜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현실과 거리가 있음에 따라 실체적인 사실과도 거리가 있다. 어떻게 보면, 모든 언어는 본질(本質)을 덮어버린다고 할 수가 있다. 또한 말과 언어는 어느 정도로 우리가 사는 현실을 덮어버린다. 덮어버리는 수단인 말과 언어도 시대의 발 빠름에 따라 새로운 말과 언어가 탄생한다.
지금의 시대를 스마트폰 시대라면, 스마트폰 등에 따른 신조어가 새로 생기기 마련이다. 국립국어원이 발표한 스마트폰 등의 신조어를 보면, ‘금사빠녀’(금방 사랑에 빠지는 여자), ‘꼬돌남’(꼬시고 싶은 돌아온 싱글 남자), ‘뇌섹남’(뇌가 섹시한 남자·주관이 뚜렷하고 언변이 뛰어나며 유머와 지적 매력이 있는 남성), ‘임금 절벽’(물가는 오르지만 임금은 오르지 않아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현상), ‘핵꿀잼’(매우 많이 재미있음), ‘눔프족’(복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복지비용을 위한 증세에는 반대하는 사람), ‘돼지맘’(교육열이 매우 높고 사교육에 대한 정보에 정통하여 다른 어머니들을 이끄는 어머니를 이르는 말), ‘모루밍족’(제품을 오프라인 매장에서 자세히 살펴본 뒤, 모바일 쇼핑을 하는 사람) 등이다. 뒤의 풀이가 없다면, 도저히 알 수가 없을 정도이다.
신조어에 당대의 철저법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는 것으로 넘어가야 할 사항이다. 그러나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말을 사용함에 틀린 것을 곧바로 지적하는 것은 좋은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에도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나 보고 일해라 절해라 하지 마라’ ‘곱셈추위’ ‘멘토로 삶기 좋은 인물’ 등이다. 이를 ‘이래라 저래라’ ‘꽃샘추위’ ‘멘토로 삼기 좋은’으로 써야 한다. 문법에 집착하는 이들에겐 ‘문법나치’라는 별칭이 붙었다. 문법이나 맞춤법, 띄어쓰기의 오류를 물고 늘어지는 사람을 독일 히틀러 나치와 같다며 비꼬는 말이다.
경위야 어떠하든 신조어 등은 새로 생긴 말이다. 하지만 ‘일해라’, ‘곱셈추위’ 등을 신조어로 보기가 어렵다. 이렇다면, 신조어는 스마트 폰 등이 생산한 말에 국한된 것으로도 볼 여지가 충분하다. 이 대목에서 ‘문법나치’의 활동이 기대된다. 스마트 폰과 문법나치의 활동에서 점차적으로 우리말이 순화될 것으로 기대를 건다. 그러나 스마트 폰의 신조어를 뒤를 바짝 따라 좇아가기엔, 너무나 먼 당신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하여튼 뒤좇아야 가야 할지 아니면 쫓아내야 할지는 당사자의 몫이다. 각자의 몫이라도, 그럼 ‘발맘발맘’은 스마트 폰의 신조어인가. 아니면, 문법나치의 공격 대상인가. 이도 저도 아니다. 한 발이나 한 걸음씩 길이나 거리를 재어 나가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을 뜻하는 토박이 말이다.
언어구조는 사유구조이다. 언어가 거치면 행동도 거친다. 거친 언어나 거친 사유가 우리사회를 일정 부분 거칠게 한다. 이 같은 것에도 논쟁이 뜨겁다. 미국의 미래학자 니컬러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인터넷이 인간의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 뇌구조까지도 안 좋은 방향으로 변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캐나다의 칼럼니스트인 클라이브 톰슨은 이 같은 우려를 정면으로 반대했다. 인터넷과 정보통신 기기의 발달은 이에 기반을 둔 인간 두뇌의 창의성과 활용능력을 배가시킨다고 주장했다.(생각은 죽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도 선택을 각자의 몫으로 돌리기엔, 사유·언어체계가 우리사회에 또 일정부분 혼란을 부를 수가 있다고 여긴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이 시를 어떻게 읽는가도 각자의 몫이다. 몫이라도 이름의 부름은 말이다. 몸짓은 행동의 사유이다. 말이 꽃인, 사유·행동으로 바꿔놓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바뀜이다. 그래서 꽃 같은 우리말 다듬기는 각자의 몫이 아니다. 위에서 각자의 몫도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여기에서 좇아가야할 것도 아니고 쫓아내야 할 것도 아니다. 먼 당신도 아니다. 각자의 몫은 말의 꽃이다. 언어·말이 현실을 덮는 은유라고 할망정, 은유에서 꽃을 찾아야겠다. 이때부터 말이 마음을 만져, 마음의 성장판을 키운다. 사회도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