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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대필' 24년만에‘무죄’…‘사과 없는 사법부’..
사회

'유서대필' 24년만에‘무죄’…‘사과 없는 사법부’

운영자 기자 입력 2015/05/19 15:29 수정 2015.05.19 15:29
"검사의 상고를 기각한다."

  지난 14일 오전 10시 23분 서울 서초동 대법원 1호 법정. '유서대필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던 강기훈씨는 김창석 대법관이 주문을 읽는 순간 24년 만에 무죄가 최종 확정됐다. 그러나 그것뿐, 김 대법관은 곧바로 다음 사건 번호를 읽어나갔다. 잘못된 사법 권력으로 인해 인생이 통째로 파탄난 강씨에 대한 사과는 한마디도 없었다.
강씨의 지인은 법정을 나서며 "어쩌면 사과 한마디 없느냐"며 "(기훈이가) 법정에 오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다. 무죄가 당연한데 왜 그 말을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듣지 못했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강씨는 1991년 5월 전국민주운동연합(전민련) 동료였던 고(故) 김기설씨가 분신자살하자, 그의 유서를 대신 써주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같은해 7월 구속 기소됐다. 당시 강씨 나이는 27세였다.
강씨는 이듬해 징역 3년을 확정 판결 받은 뒤 1994년 8월 만기 출소했다. 20대의 마지막 시기를 차가운 감옥에서 보낸 것이다. 출소 이후 강씨는 인권활동가, 번역가, 학원 관리직, 벤처업체 사원 등을 두루 거쳤지만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직장을 얻을 때마다 주변에선 "그 경력에 취직도 하고 용하다"는 얘기가 들렸다. 동료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어딜 가나 따라다녔다.
그러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11월 유서의 필체가 강씨가 아닌 김씨의 것이라고 판단했다.
강씨는 이듬해 1월 재심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재심 개시 결정을 차일피일 미루다 재심 청구 4년여 만인 2012년 10월에야 재심을 결정했다. 검찰은 그 기간 재항고를 하고 무죄 판결에 재상고까지 하면서 시간을 끌었고 설상가상으로 강씨는 간암 판정까지 받았다.
"지난 20여 년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억이 날 정도로 악몽과 같은 시간이었다. 동료의 자살을 방조하고 유서를 대필한 악마라는 낙인찍기는 그 어떤 목적으로도 행해져선 안 되는 비인간적 상상에 불과하다. 본의 아니게 20여 년 동안 화제의 중심에 놓였지만 이제는 잔혹한 시간, 증오심과도 이별하고 싶다"
강씨는 지난해 1월 재심사건 마지막 공판기일에 출석해 이 같이 밝히면서 "진정한 용기는 스스로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통스러운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사법권력이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사과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환기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날까지 법원이나 검찰, 어느 누구도 강씨에게 그 흔한 유감 표명조차 하지 않고 있다. 잘못된 과거는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한다. 한 사람의 파탄난 인생 앞에 겸손하게 고개 숙일 줄 조차 모르는 사법부에 과연 정의는 살아있는 것일까.
이제라도 사법부가 법과 정의의 산실임을 증명하기 위해선 강씨에 대한 사과부터 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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