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빨래' 대학로서 10주년 특별공연 마지막 무대
14일 오후 동양예술극장 1관에서 뮤지컬 '빨래' 10주년 특별공연 마지막 무대를 마친 뒤 배우들이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
반신불수의 딸이 동사무소 직원으로부터 모욕을 당한 뒤 주인할매(이정은)가 빨래를 하기 시작하자 객석 곳곳에서 훌쩍거리기 시작한다.
똥이 묻은, 마흔살 딸의 기저귀를 빠는 순간이다. "다 자기 냄새를 풍기며 사는 거지. 슬플 때 빨래를 혀. 이것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지." 일상의 노동인 '빨래'가 결국 묵은 때를 씻어내는 셈이다.
뮤지컬 '빨래' 10주년 특별공연의 마지막 무대가 열린 14일 오후 대학로 동양예술극장 1관. 그동안 켜켜이 쌓인 이 뮤지컬에 대한 배우·스태프·관객들의 애정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모두 슬플 때 마음껏 울었고, 기쁠 때 마음껏 웃었다.
공연 관람이라기보다 파티나 축제 같았다. 추민주 연출은 이날 공연 전 열린 간담회에서 "오랜만에 만난 배우들이 서로 안부를 확인하고 (다른 시즌에 출연해서) 처음 보는 배우들이 인사를 한 뒤 한번에 뜨거워지는 것을 지켜보는데 명절 같았다"고 웃었다.
대학로 소극장 관객 감소에 큰 여파를 미친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여파와 블라인드 캐스팅에도 11일부터 이날까지 6회 차 공연 약 1400석은 티켓 오픈 1시간 만에 매진됐다.
서점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나영'과 몽골 출신 노동자 '솔롱고', 반신불수 딸을 돌보는 주인할매, 동대문에서 여자 옷을 파는 과부 '희정엄마' 등 서울 달동네 소시민들의 가난하지만 건강한 살림살이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렸다.
추 연출이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공연으로 기획했다. 2005년 국립극장에서 기획한 '이성공감 2005'에 참여하며 초연했다. 이후 입소문을 타며 지금까지 약 50만명이 관람했다. 22명의 솔롱고, 20명의 나영을 비롯해 123명의 배우가 거쳐 갔다.
이번 특별공연에는 그동안 출연 배우들의 3분1 가량인 49명이 참여했다. 본래 1회 차에 필요한 배우는 8명인데 배역을 나눠 13명씩 출연했다. 이날 나영은 이지숙, 솔롱고는 박정표가 연기했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주인공이었다.
특히 실제 할머니가 무대 위에 오른 듯했던 이정은의 열연이 돋보였는데, 그녀가 내뱉은 대사들은 주인할매가 마지막에 나영이와 희정엄마에게 건네는 세제처럼 묵은 때를 씻어내는 힘이 있었다. 영화 '도둑들' '하녀' 의상감독이기도 한 공연제작사 씨에이치 수박의 최세연 대표는 앞서 기자들과 만나 "이정은 배우가 오늘을 끝으로 할머니 역에서 은퇴할 것 같다"고 했다.
민찬홍 작곡가의 넘버들의 울림은 여전했다. '서울살이 몇핸가요' '참 예뻐요' 등 서정성이 배인 적당한 따듯함은 극의 소박한 정서를 유지하는 힘이었다.
2006년 2월 상명아트홀 공연에서는 피아노, 더블 베이스, 기타, 하모니카 등의 악기로 반주를 했으나 이후 5인 챔버 앙상블의 연주 녹음에 기타와 하모니카의 라이브 연주를 덧대왔다. 이번에는 첼로, 어쿠스틱 기타, 퍼커션으로 2006년의 라이브를 추억했다.
뮤지컬 '빨래'의 후원자로서 이 뮤지컬이 소극장 아트센터K 네모극장에서 중극장인 두산아트센터 연강홀로 옮기는데 크게 기여한 배우 김희원이 '빨래하는 남자' 작가 역을 맡아 카메오로 등장, 2막 시작할 때 나영이가 일하는 서점에서 사인회를 열어 실제 객석의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사진을 함께 촬영하기도 했다.
아트센터K 네모극장은 이날 '빨래'가 공연한 동양예술극장 1관의 전신이다. 김희원은 2008년 아트센터K 네모극장일 당시 이 극장에서 처음 '빨래'를 봤는데 당시 3차 공연 첫날인 그 해 3월15일 유료 관객 수는 2명에 불과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공연이 끝난 뒤 무대에 올라 "이후 6개월 동안 유료 관객 수가 배우 수를 넘지 못했어요. 이후 매진이 되더니, 일본에 라이선스 수출했고 이제 중국 진출도 눈앞에 둬 감회가 새롭다"고 즐거워했다.
일본에서 10주년을 축하해주러 온 손님들도 있었다. '빨래'를 일본 무대에 올린 현지 공연 제작사 퓨어메리의 호사카 마리코 대표는 "일본에서 큰 지진이 있었을 당시 한국에서 빨래를 봤다"면서 "'빨래'의 건강한 느낌과 기운을 일본에 전해주고 싶어 현지에서 공연했다"고 전했다. "일본 관객들도 좋아해 도쿄 외에 지방에서도 투어를 했고 9월에도 공연한다. 일본에서도 오래도록 공연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날 공연이 끝난 뒤 '빨래 어워즈'도 펼쳐졌다. '관객 부문'에서는 68장 티켓을 보유한 관객이 '최대 관람자 상', 2006년도 티켓을 가지고 있는 관객이 '제일 오래된 티켓 상'을 받았다. 배우 상 부문에서는 김지훈이 674회 출연으로 최다 출연상을 가져갔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일본에 소개하기도 한 문화 기획자 사노 료이치가 '빨래'를 일본에 알린 공로로 감사패를 받았다.
이밖에 김태호 '무한도전' PD를 비롯해 배우 김윤석, 한예리 등은 현장을 찾아 '빨래' 10주년을 축하했고 영화감독 봉준호, 최동훈과 MC 신동엽 그리고 '빨래'에서 솔롱고 역을 맡았던 뮤지컬스타 홍광호 등은 영상을 통해 축하의 마음을 전했다.
추민주 연출은 공연 전 열린 간담회에서 '빨래'의 10주년 원동력에 대해 "나영이를 통해 그처럼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10년이 지나 한 때 개작도 생각했지만 시절이 하수상해서 이야기를 당분간 계속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최세연 대표는 '빨래'의 영화화를 추진 중이라면서 5년 뒤 개봉할 예정이라고 했다. 추 연출이 영화의 감독도 맡을 예정이다.
공연과 10주년 행사를 모두 마친 뒤 배우들은 '비오는 날이면'을 합창했다. "비오는 날이면 외롭고 쓸쓸한 마음 우산 하나 받쳐 들고 또 하루를 살아가요"라는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관객들은 공연장을 빠져나갔다. 함부로 피아노를 치지 않는 민찬홍 작곡가의 연주, 추민주 연출의 하모니카 소리가 덧대졌다.
관객들은 공연이 끝난 뒤 동양예술극장 마당에 세워진 분식 차를 만날 수 있었다. 관객 뿐 아니라 배우, 스태프들이 어우러져 분식을 나눠먹었다. 달동네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이 나누는 '빨래'의 따뜻한 정서 그대로였다.
'빨래'는 16일부터 동양예술극장 1관에서 17차 공연에 돌입한다. 4년 간 핀란드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마이클을 연기한 김지훈이 솔롱고로 마침내 데뷔한다. 최다 출연상을 받은 그다.
◇뮤지컬 '빨래'의 해외 진출= '빨래'는 '김종욱 찾기' '총각네 야채가게'와 함께 일본과 중국 라이선스 공연을 모두 성사시킨 창작뮤지컬로 등극하게 됐다. 2012년 일본 공연제작사 퓨어마리에 라이선스 판매돼 현지에서 수차례 공연한 '빨래'는 2016년 1월 14~17일 상하이 드라마 예술센터, 같은 달 21~24일 베이징 샤오 커 음악극장 무대에서 초청 공연한다. 홍콩의 콘텐츠 전문 회사 클리어씨와 손잡고 중국에서 5월께 라이선스 공연도 선보인다.
씨에이치 수박의 류미현 PD는 "일본에 수출됐던 것을 바탕으로 삼아 중국에서는 더 체계적으로 선보일 것"이라면서 "추민주 연출이 중국 라이선스 '빨래'에 출연할 배우를 오디션을 통해 뽑는다"고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