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배사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고들 한다.
단순히 자리의 흥겨움을 돋구는 것을 넘어 당시의 세태를 반영해서다.
대표적인 것이 '남행열차'다. 공무원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음 직한 이 건배사는 "'남'다른 '행'동과 '열'정으로 '차'기 정부에서 살아남자"는 뜻의 줄임말이다. 뒤숭숭한 정권 말 공무원들의 초조함을 잘 표현한다.
하지만 새 정부의 열차가 승강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갈아 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처세에 밝은 공무원이란 비아냥을 살 법하다.
"총선 필승!". 이 건배사 한 마디가 정국을 뒤흔들고 있다.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은 지난달 25일 열린 새누리당 의원 연찬회 만찬 자리에서 자신이 '총선'이라고 외치면 '필승'으로 화답해달라는 건배 제의를 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 장관의 출마설이 파다하다. 때문에 건배사가 여당 의원들을 향한 단순한 덕담으로 여겨질 리 만무한 것 아닌가.
정 장관이 뒤늦게 밝혔듯이 "어떤 정치적 의도나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치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더 큰 문제다. 중립적으로 선거를 관리해야 할 주무 장관의 본분을 스스로 저버리는 발언을 자각 없이 내뱉은 셈이 된다. 선거에 대한 총체적 불신과 선거관리위원회의 존립 근거마저 위협받을 수 있다.
이것은 "건배사가 익숙하지 않아"라는 식의 변명으로 이해를 구할 수 없다. 섣부는 건배사가 망사(亡事)가 될 수도 있다.
정 장관의 사과가 '억울하지만 당장 급한 불부터 끄자'는 심산이 아니라면, 건배사에 이어 사과에 두 번 눈살 찌푸려야 했던 국민의 마음을 되돌리는 데 자리를 내놓을 각오도 불사해야 한다.
정 장관이 익숙치 않아 놓치고 있는 것은 세상사(事) 담긴 건배사 뿐이 아니다.
신중치 못한 자신의 처신에 대한 깊은 반성만이 무형의 자산인 평판과 신뢰를 놓치지 않는 최선의 출구전략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