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문재 언론인
왕이 뛰어나면 그 나라에 불행을 가져온다. 절대권력을 쥐고 있는 데다 유능하다. 모든 것을 자신이 결정한다. 그는 인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훌륭한 신하가 성장할 기회도 없다. 왕의 그늘에 가려 자신의 역량을 키우지도 못한다. 그저 왕의 명령을 실행할 뿐이다.
춘추전국시대 조나라 무령왕은 뛰어난 군주였다. 기존의 사고방식을 훌쩍 뛰어넘었다. 혁신 역량과 함께 추진력도 겸비했다. 옳다고 생각하면 과감하게 밀어붙였다.
대표적인 게 호복(胡服) 착용이다. 말 그대로 '오랑캐 옷차림'이다. 소매는 좁고, 길이는 짧아 걸리적거리는 게 없었다. 전투복으로서는 최고의 기능을 발휘했다. 기병(騎兵)의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춘추전국시대 왕들은 수레를 타고 다녔다. 하지만 무령왕은 말을 고집했다. 말을 타고 선두에서 기병을 지휘하기도 했다.
조야(朝野)가 강력히 반대했다. 천하의 중심에서 오랑캐 옷을 입다니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무령왕의 숙부 성(成)공자는 "왕께서는 중국을 떠날 작정이시오?"라며 반발했다.
무령왕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한 술 더 떴다. 전쟁은 물론 평상시 정무를 볼 때도 호복을 입겠다고 선언했다. 반대를 물리치기 위한 강수(强手)였다.
강요와 논리적 설득을 병행했다. 무령왕은 "옷과 예절은 인간의 편리한 삶을 위한 것"이라며 "호복은 불편한 것을 편리한 것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호복을 입다 보면 곧 익숙해질 것"이라며 "옛 예절이 맞지 않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예절을 정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창의성에 추진력은 물론 두둑한 배짱까지 갖췄다. 진(秦)나라 사정을 확인하기 위해오랑캐의 사자(使者)로 위장한 후 진나라 소양왕을 직접 알현하기도 했다. 진나라 상황을 속속들이 파악한 후 느긋하게 귀국했다.
무령왕에게도 단점은 있었다. 여자에게 약했다.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애정이 후계 구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후계구도의 혼선은 비극을 불러일으켰다.
무령왕은 일찌감치 후계자를 결정했다. 정실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을 태자로 내세웠다. 태자 장(章)이었다. 태자 교육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중산국을 정벌할 때도 태자에게 일부 군사를 떼어준 후 지휘를 맡겼다.
정실이 아니라 다른 여인을 사랑하게 되자 태자에 대한 애정도 식기 시작했다. 무령왕은 후궁 맹요(孟姚)를 끔찍이 사랑했다. 맹요는 하(河)공자를 낳았다. 훗날의 혜문왕이었다.
여인에 대한 사랑이 아들에 대한 애정으로 고스란히 투영됐다. 마침내 태자를 쫓아내고 안양군으로 봉했다. 그 자리에 하(河)공자를 앉혔다.
춘추전국시대는 군주는 12세가 되면 성인으로 취급했다. 하(河)공자가 12살이 되자 혜문왕으로 즉위했다. 무령왕은 은퇴한 후 자신을 주부(主父)로 부르도록 했다. 실권은 주부가 행사했다.
혜문왕의 생모가 죽자 주부의 마음은 승(勝)공자의 생모로 옮겨갔다. 승(勝)공자는 훗날 평원군(平原君)으로 널리 이름을 알렸다. 주부는 서둘러 혜문왕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을 후회했다.
이런 심경은 신하들에게도 전해졌다. 혜문왕을 폐위할 것이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이복동생에게 밀려난 안양군의 거사를 부추겼다. 안양군은 헤문왕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신하들은 혜문왕을 지지했다. 주부의 일방통행식 통치에 염증을 느낀 데다 왕권 교체가 큰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반란은 이내 진압됐다. 안양군의 목도 달아났다.
차마 주부의 목에 칼을 들이댈 수는 없었다. 그 대신 주부가 머무는 별궁을 포위했다. 물이나 양식도 일체 들여보내지 않았다. 주부는 4개월 후 굶어 죽었다.
절대군주는 죽음과 함께 자리에서 물러난다. 죽는 날까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왕이 끝까지 지혜를 잃지 않으면 비극은 최소화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다.
힘을 갖고 있더라도 물러설 때를 알면 명예를 지킬 수 있다. 때가 되면 떠나는 게 순리(順理)다. 남들이 아쉬워할 때 떠나는 것은 축복(祝福)이다. 순리를 어기면 축복도 기대할 수 없다.
롯데그룹의 경영권 분쟁은 순리를 어겼기 때문에 빚어졌다. 최고경영자가 순리를 어긴 탓에 본인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고, 조직은 큰 위기를 맞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