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간에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외교논쟁은 역사적으로 3번 있었다.
첫 번째는, 1693-1696년 안용복 월경사건으로 1차도일로 1696년 막부가 스스로 울릉도와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정하도록 했고, 2차도일로 1697년 정식 외교 루터로 대마도가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도록 한 것이다.
두 번째는, 일본이 러시아를 침략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1905년 전쟁 중에 국제법을 가장하여 독도를 몰래 침탈하기 위해 함부로 무주지라고 하여 지방정부인 시마네현에 편입하였다, 한국정부가 이 사실을 알고 1900년 칙령41호로 울도(鬱島)군을 설치하여 행정적으로 독도를 관할 통치했다는 사실을 제시하여 통감부에 강력히 항의했고 동시에 독도 편입을 인정하지 않았던 일이다.
세 번째는, 일제 36년간의 불법 식민지 통치를 거쳐 일본이 제2차대전에서 패전하여 1951년 대일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친일파 미 국문성 정치고문 윌리엄 시볼드를 이용하여 독도를 탈취하려고 했다, 이때에 영국 호주 뉴질랜드의 영연방국가의 반대로 독도 영유권이 일본에 넘어가지 못했다.
그것은 독도의 영유권은 1696년 안용복 월경사건 때 일본이 독도를 한국영토임을 인정한 사실, 1877년 메이지정부가 이를 계승하여 태정관지령으로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스스로 인정한 사실, 1946년 1월 연합국군 최고사령부 사령관이 SCAPIN 677호로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정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무성의 정치고문인 시볼드의 친일적인 정치적 행위 때문에 영미중심의 연합국은 독도 영유권을 명확히 처리하지 않았다.
이승만대통령이 연합국의 조치에 대항하여 독도 영유권의 본질을 바탕으로 평화선 선언을 강행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오늘날 한국이 독도를 실효적으로 관할 통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정부는 안용복 월경사건으로 막부가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정한 독도 영유권의 본질을 무시하고, 1905년 독도를 도취하려고 했던 시마네현고시 40호의 침략행위를 영토취득 행위라고 사실을 왜곡한 친일파 시볼드의 정치적 행위를 바탕으로 1965년 한일협정 때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용복 월경사건의 본질에 대해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즉, 고대의 신라, 고려시대에는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고, 조선시대에는 쇄환정책으로 울릉도를 비웠다.
이때까지의 독도는 울릉도와 더불어 평온한 한국의 고유영토였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계기로 일본사람들이 울릉도가 비워진 사실을 알고 대나무가 많은 섬이라고 하여 “이소다케시마(磯竹島), 다케시마(竹島)”라고 불렀고, 급기야 1614년 대마도주(對馬島主)가 동래부에 사신을 보내어, “경상도와 강원도 중간 해상에 있는 울릉도는 일본영토 같으므로 조사하겠다.”라고 일본영토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조선조정은 “울릉도에 불법 침입하면 적으로 단정하여 쫓아내겠다.”고 경고한 후, 대마도의 울릉도 영유권 주장은 잠잠했다.
다른 한편으로 호키주(伯耆州) 출신 오야(大谷), 무라카와(村川) 두 가문의 어부는 조선조정 몰래 막부로부터 도해면허를 취득하여 1625년부터 70여 년간 독도를 거쳐 울릉도에 왕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693년 봄 울릉도에서 안용복 일행과 조우하여 어부들 간에 영유권 다툼이 발생하고 급기야 양국 간의 외교분쟁으로 확대되었다.
일본측 고문헌에 의하면 1692년 일본어부들이 울릉도에서 조선인들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고, 이듬에 1693년 일본어부(大谷家)들이 총을 구입하여 울릉도 도항했는데, 그때 안용복 일행을 만났다.
안용복 일행은 4척의 배로 40여명이 울릉도에 들어왔다. 무리들 중에 안용복과 박어둔 두 사람은 술로 일본인들에게 유인당하여 총칼의 위협으로 일본의 오키섬에 납치당했다. 안용복은 오키섬에서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여 호키주 태수에게 인도되었다.
호키주 태수는 울릉도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안용복 일행의 도일 사실을 막부에 보고하였다. 1695년 12월 막부는 돗토리번(鳥取藩)으로부터 보고받은 “돗토리번 답변서”를 통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영토임을 확인하고 일본인들의 울릉도 독도 도해를 금지시켰다.
당시 조선과 일본 사이의 정식 외교루트는 대마도였다. 그래서 안용복은 막부의 지시에 따라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영토라는 호키주 태수의 서계를 받아들고 일본측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면서 동래로의 귀환을 위해 대마도에 도착했다.
이처럼 안용복의 제1차 도일은 비정식 외교루트를 통해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조선과 정식외교를 담당하고 있던 대마도는 여전히 울릉도에 대한 탐욕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울릉도를 갈취하기 위해 비정식 외교루터로 울릉도 독도 영유권을 인정받은 안용복이 지참한 막부의 지시에 의한 호키주 태수의 서계를 빼앗고 대마도에 억류시켰다.
대마도는 조선조정에 대해 안용복을 볼모로 일본령 “다케시마(竹島)” 표류자를 송환한다고 하여 “다케시마(울릉도의 일본명칭)”의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조선조정은 한일 간의 외교적 분쟁을 피하면서 울릉도의 영토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령은 “다케시마”이지만, 안용복은 조선령 울릉도에 표류한 것이라고 했다.
대마도는 울릉도가 바로 일본령 “다케시마”라고 하여 조선조정이 울릉도 영유권을 포기할 것을 강요했다. 대마도가 울릉도의 영유권을 주장함으로서 조선조정과 대마도 사이에 영유권 논란은 좀처럼 해결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안용복은 대마도 억류 9개월 만에 동래로 귀국 조치되었다. 안용복은 비변사의 조사를 받고 불법 월경죄로 2년간 옥살이를 했다.
안용복은 정식외교 루터인 대마도가 여전히 울릉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대마도의 행태를 막부에 고발하기 위해 1696년 6월 안용복은 관복을 입고 “조울양도감세장 신안동지기(朝鬱兩島監稅將臣安同知騎)”라는 직함을 단 깃발을 달고 뇌헌 등 5명의 승려, 글을 잘하는 이인성과 함께 11명이 울릉도에 둘어가 일본인들을 조우하고, 다음날 독도에서도 이들을 만났다.
안용복은 일본인들이 “송도(松島)”가 일본영토라는 주장에 대해 조선의 “자산도(子山島)라고 꾸짖고 이들을 뒤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