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에 갈 일이 있었다. 시내가 아니라 면지역이다. 마침 시간도 남아서 차를 몰고 가지 않고 시골버스를 타보기로 했다.
모처럼 시골에 가보는데 어릴 때 추억을 살려 보고 싶었다.
지인중에는 시골 체험을 한다며 학교 교사를 퇴직 후 전라남도 해남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있다. 시골에서 1년 동안의 생활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나는 그 정도까지는 할 수 없고 그냥 버스를 타고 체험해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초등학생 때 영일군의 면 지역에 살았는데 당시 포항시내에 가기 위해서는 면소재지까지 걸어가서 30분에 한 대씩 있는 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한시간 이상 달려야 했지만 버스타는 것이 좋았다. 시내에 나가는 것이 무척 즐거웠기 때문이다.
대부분 만원버스라 서서 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시골을 벗어난다는 사실이 즐거웠고 도시 구경이 신이 났었다. 시골 소년에게는 차를 타보는 것 자체가 좋은 경험이었다.
시골버스를 타고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보고 싶었다.
대구시내에서 영천터미널까지는 지하철과 시내버스로 갔다. 요즘 대도시권 광역교통 시스템이 잘 되어 있다. 그러나 터미널에서 목적지까지는 가는 길은 영천시 자체의 교통 시스템이다. 내가 타야 할 시골버스는 배차간격이 한시간에 한대였다. 이마저도 시골버스 중에서 배차가 많은 노선이었다. 다른 버스들은 하루에 한두대 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시골버스를 타고보니 50년 가까운 시간동안 버스운행환경이 많이 변한 것 같다, 요즘은 대부분의 도로가 포장되었고 버스도 에어컨이 나오는 등 하드웨어적인 측면은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버스업계의 사정은 악화되었다. 승객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버스는 적자운행을 한다. 그럼에도 버스를 존치하는 이유는 시골에서 자가용이 없는 사람들의 유일한 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공부문에서 운영하거나 적자를 지원해 주고 있다.
버스업계로서는 현금장사로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불렀던 옛날이 그리울 만 했다.
영천 터미널에서 버스가 출발할 때 승객이 나 혼자였다. 도중에 영천역에서 사람이 많이 탔다. 무심코 타는 승객을 보니 대부분 나이가 많으신 노인들 이었다. 나보다 어리거나 비슷한 연배는 아무도 없었다. 곧 60이 되는 내가 가장 젊은 승객인 것 같다. 이 시간에 나 같은 사람이 시골버스를 타는 것 자체가 이상할 것 같았다.
시골행 버스지만 포장된 국도를 달렸다. 4차선의 국도였다. 요즘은 시골길도 모두 포장된 도로이다. 비포장도로는 없었다.
예전의 시골버스의 추억은 경험하지 못하였다. 당시는 만원버스에 덜컹거리면서 가야 했다. 버스요금을 받는 안내양도 있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승객분들의 얼굴을 보니 단순히 연세만 드신 것이 아니라 아프신 분들과 같은 얼굴이다. 노후에 건강을 잘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들간 아는 사이가 많은지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었다. 도시 시내버스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그나마 느낄 수 있는 시골버스의 모습이었다.
가는 도중 누군가 하차벨을 잘못 눌렀는데 기사분은 화를 내지 않으셨다. 그런데 또 누군가 잘못 눌렀다. 그제서야 기사는 한마디 하신다. “다음에 또 누르시면 버스가 늦게 가게 됩니다” 화난 목소리는 아니었다. 살펴보니 기사분도 나이가 지긋하시다. 아마도 이런 일이 익숙하신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시골분들의 입장을 이해하시는 표정이다.
버스여행을 하면서 내가 모르는 부분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르는 이유는 도시에서 갇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같은 사람이 시골생활에 대해 알 수가 없다. 시골에 가더라도 차를 몰고 다니다보면 시골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시골을 구경하는 것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퇴직후 노후에 전원생활에 대한 로망이 있지만 막상 퇴직 후 도시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늙을수록 잔병치레가 많은데 시골에는 병원을 이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늙을수록 의료시스템이라는 인프라가 필요하다. 이런 인프라 없이는 살 수 없나 보다. 그러나 인프라 바깥 세상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옛날 임금이 지방물정 모르는 경우 구중심처에 갇혀지낸다고 했다. 현대인은 인프라라는 장막에 갇혀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시스템에서 벗어나면 아무것도 모른다.
도시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은 도시보다는 시골지역의 면적이 넓다. 그리고 인프라 바깥세상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