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에 걷기 어플을 깔았다. 하루에 걸음 수만큼 현금을 지급한다고 했다. 8899보를 걸으면 10원에서 100원까지 지급된다. 물론 큰 돈은 아니다.
이런 어플은 예전부터 유행했었다. 건강도 챙기고 돈도 버는 일석이조라며 홍보하는 어플들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깔지 않았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어플을 깐 이유는 많이 걸을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초기보다 나쁜 조건이다. 물론 돈은 중요하지 않다. 걷기를 통해 하루에 1000원을 버나 10원을 버나 어차피 이 수익으로 돈을 모을 수는 없다. 하지만 재미가 있다. 숫자로 나타나니 목표를 세울 수도 있다.
요즘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한다. 환경보호를 위해 차량운행을 자제한다거나 건강을 생각한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K-Pass라고 대중교통이용요금을 일부 환급해주는 제도도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걷는 일이 많아졌다. 걷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런데 이렇게 걷는 것이 무의미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의미를 주기 위해 기록을 하고 싶었다. 다행히 요즘은 기록을 도와주는 장치가 많이 생겼다. 그래서 걸음 수 까지 기록이 가능하다. 이 어플이 바로 그런 장치이다.
기록은 흥미 있는 컨텐츠를 만들어낸다. 스포츠 경기는 기록이 없으면 재미가 없다. 야구나 축구에서 홈런이나 골 기록은 팬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 이런 기록들이 스토리텔링이 될 수도 있다.
스스로 기록할 대상을 만드는 사람도 많다. 육아일기, 수험일기 등이 대표적인 컨텐츠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후 꽃이나 채소를 기르면서 의미를 둔다는 스토리는 많이 듣는다
사실 의미없는 일은 없다. 단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뿐이다. 의미 부여는 기록이 되어야 가능하다. 기록이 되어야 실체가 만들어지고 나중에 활용을 할 수 있다.
나는 학생시절부터 기록하는 것을 좋아했다. 고3 때 대입시럼 공부를 하면서 무슨 책을 몇 번 읽었는지를 기록했다. 기록하는 재미로 공부의 지루함을 이겨낼 수 있었다.
직장 생활하면서는 가 본 거리를 지도에 표시를 했다. 다이어리에 부록으로 붙어 있는 지도에 색이 있는 네임펜으로 표시를 했다. 여행을 하면서 지도에 표시하기 위해 시간이 남으면 일부러 다른 길로 가보기도 했다. 1년 동안 가본 지역의 표시를 보면서 다음에는 어느 지역을 가본다는 식의 구상도 했다.
살면서 어떻하든 시간은 보내게 된다. 시간을 보내면서 하게 되는 행동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허무해진다. 특히 나이를 먹게 되면서 허무하게 보내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전에 의미 없이 하던 일들에 의미를 찾게 되었다. 젊을 때 즐기던 일을 이제 할 수 없게 되면서 다른 일에 집중하거나 하찮게 생각하던 일을 의미를 두게 된 것이다.
이런 것들이 예전에도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해서 불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단지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기록을 하게 되니 의미가 주어진 것이다.
나중에 기록들을 되돌아 보며 반성을 할 수 있다. 기록을 의식하면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하게 된다. 그래서 부끄럽게 살지 말자고 다짐하게 된다.
요즘 환경이 바뀌어서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일들이 많다. 이런 일들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걷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요즘 새로운 출발이라는 의미도 있다. 나이를 먹었으니 건강을 챙긴다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이런 기록들이 나중에 데이터가 되어 우리를 통제하는 수단이 될지는 모를 일이다. 정보화 사회에서 데이터의 무서움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많다. 사실 내가 의식하든 안하든 나의 행적이 기록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기록들은 내가 스스로 하는 기록보다 더 광범위하고 정확하다. 악용이 된다면 끔찍할 수도 있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록당한다는 말이 나올 만하다.
결국 적극적으로 기록을 하며 관리를 해야 한다. 내가 기록을 하는 것은 스스로 통제한다는 의미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