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찬곤(경북과학대학 교수, 시인, 경영학박사)
언어는 이제 의사전달만 되면 그 기능을 충실히 다한다고 말할 수 없게 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단순한 의사전달 이상의 가슴에서 우러나는 정서와 그 시대상을 담고 있다는 것이 추세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대는 단지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문화가 다른 외국과의 교류를 시도하는 시대가 아니라, 국내와 국외의 구별이 없어져가고 특정국가에서만 통용되는 범위를 벗어나 대다수 많은 나라에서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공통적인 정서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미 '글로벌화'된 환경에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까닭으로 우리나라도 몇몇 외래 단어를 한글로 통일하여 표기하는 수준이 아니라 이제는 외국 현지의 사용 언어를 우리나라 실정에서 원만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정성을 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경우에 따라서는 외국어를 그대로 써야 오히려 이해가 빠르고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알릴 수 있기도 하다. 그래서 지구촌의 국적이 다른 사람들과 일상적으로 접촉할 때는, 오해를 뛰어넘을 수 있는 언어적 능력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는 어떤 일관된 규칙으로 엄격한 적용이 필요했을지언정 이제는 현실적으로 다소의 융통성 있는 적용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외국어를 우리가 편리한대로 표기의 통일성에만 신경을 곤두세울 것이 아니라 되도록 외국의 원어민 발음에 가까우면서 우리 국민의 정서를 순화할 수 있는 기능을 동시에 가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녹녹치 않다. 문화가 다르고 언어의 구조가 다른 데서 오는 근원적인 문제에서가 아니라, 현재 통용되는 외국어 표기법에 드러나는 여러 가지 규정으로 곤란을 겪는 사례가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급격한 교류확대를 보이고 있는 중국어의 경우는, 오래 전부터 오해를 넘어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어 이에 대한 점검이 필요해 보인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저우룬파', '장궈룽' '청룽'이라고 하면 누가 알아들을까? 영화배우 '주윤발'과 '장국영' '성룡'이라고 하면 오히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말이다. '텐안먼'과 '쓰찬성'은 또 어떤가? '천안문', '사천성'으로 하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 본 익숙한 지명이다. '북경오리'라는 요리를 '베이징오리'라고 한면 우리로서는 무언가 어색하게 느껴지고, '사천 탕수육'을 '쓰찬 탕수육'이라고 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요리가 아닌 듯하다. 뜻이 글자에 들어있는 중국어는 '쓰찬성'보다는 '사천성(四川省)'이 당연해 보이고, '텐안먼' 보다는 '천안문(天安門)'이 훨씬 이해하기가 빠르다. 중국인들이야 발음대로가 이미 그들의 정서나 감정이 고스란히 그 표기에 들어있을 것이지만 우리는 다른 것이다.
우리글인 '소리글자'대로라면 시냇물이 흘러가는 '졸졸졸' 소리가 마음으로 와 닿지만,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고, 우리나라 봄 들판에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가을 들판에 곡식이 '누르스름'하게 익어가며, 얼굴이 ‘가무잡잡’하다는 표현 등은, 외국의 경우는 또 다른 문제인 것이다.
우리 말 글자가 소리로써 의미 있듯이, 대표적인 표의문자인 한자는 뜻이 들어있어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만약 뜻이 들어있지 않다면 중국에서는 글자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셈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쯔진청' 보다는 '자금성(紫禁城)'이, '완리창청' 보다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청두'보다는 '성도(成都)'가, '뤄양' 보다는 '낙양(洛陽)'이, '시안' 보다는 '서안(西安)'이, '옌볜' 보다는 '연변(延邊)'이, '헤이룽장성' 보다는 '흑룡강성(黑龍江省)'이 익숙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한 나라의 지명이나 인명을 현지에서 사용되는 원래의 발음으로 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공자(孔子)는 '공자'이지 '쿵쯔'가 아닌 것이다.